01'세밑에 경상도에서 안부를 묻다.'
1847년 신종익 간찰
신종익(발급), 심능규(수취) 울산에서 경상좌병사로 근무하고 있던 신종익이 조세 독촉문제로 경상도 최북단지역에 이르렀을 때, 강릉세족인 심능규에게 일련의 내용을 청하고 안부를 물었다. 바로가기
신종익(발급), 심능규(수취) 울산에서 경상좌병사로 근무하고 있던 신종익이 조세 독촉문제로 경상도 최북단지역에 이르렀을 때, 강릉세족인 심능규에게 일련의 내용을 청하고 안부를 물었다. 바로가기
02'죽은 아내의 관값을 위해 논을 팔다'
1718년 배만중 논 매매 문기
배만중(발급), 함씨(수취) 1718년 배만중은 아내의 관값을 마련하지 못하자, 신리원 소재의 논 10마지기를 함씨에게 23냥에 팔았다. 최상연이 이 사연을 담은 매매계약서를 작성했다. 바로가기
배만중(발급), 함씨(수취) 1718년 배만중은 아내의 관값을 마련하지 못하자, 신리원 소재의 논 10마지기를 함씨에게 23냥에 팔았다. 최상연이 이 사연을 담은 매매계약서를 작성했다. 바로가기
03'운현궁으로 돌아오다.'
1876년 이하응 간찰
이하응(발급), 신좌모(수취) 최익현의 상소로 양주 직곡에 은거하고 있던 대원군의 봉환을 청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고종이 상소를 금했으나 1875년 6월 18일 4도 유생들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상소에 나선 유림들이 위기에 처하자 대원군은 우중에 급히 행장을 꾸려 운현궁으로 돌아왔다. 바로가기
이하응(발급), 신좌모(수취) 최익현의 상소로 양주 직곡에 은거하고 있던 대원군의 봉환을 청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고종이 상소를 금했으나 1875년 6월 18일 4도 유생들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상소에 나선 유림들이 위기에 처하자 대원군은 우중에 급히 행장을 꾸려 운현궁으로 돌아왔다. 바로가기
04'노비 운년이 처가에서 상속받은 논을 노비 운성에게 팔다'
1607년 노 운년 논 매매 문기
노 운년(발급), 노 운성(수취) 1607년(선조40) 9월 20일에 서울 사는 노(奴) 운년(運年)은 빈한하여 부인이 처가에서 상속받은 논을 방매했다. 조선시대 자산의 일부로 간주되던 노비끼리 토지를매매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운성은 매매대금으로 암소 한 마리, 포목 여덟 필, 정조 여섯 섬, 그리고 목면 6필 등을 지불했다. 숙종대까지의 거래는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으니, 운년과 운성의 거래가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다. 거래의 증인도 노비였으므로, 모두 서명하지못하고 수촌(手寸)을 했다. 직접 문서를 작성한 필집(筆執) 하응청은 중9품 품계인 계사랑(啟仕郎)을 이름 앞에 쓰고 착명하였다. 바로가기
노 운년(발급), 노 운성(수취) 1607년(선조40) 9월 20일에 서울 사는 노(奴) 운년(運年)은 빈한하여 부인이 처가에서 상속받은 논을 방매했다. 조선시대 자산의 일부로 간주되던 노비끼리 토지를매매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운성은 매매대금으로 암소 한 마리, 포목 여덟 필, 정조 여섯 섬, 그리고 목면 6필 등을 지불했다. 숙종대까지의 거래는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으니, 운년과 운성의 거래가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다. 거래의 증인도 노비였으므로, 모두 서명하지못하고 수촌(手寸)을 했다. 직접 문서를 작성한 필집(筆執) 하응청은 중9품 품계인 계사랑(啟仕郎)을 이름 앞에 쓰고 착명하였다. 바로가기
05'고종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신하가 없음을 한탄하다.'
미상년 이하응 간찰
이하응(발급), 신좌모(수취) 최익현의 상소로 양주 직곡에 은거하고 있던 대원군은 아들 고종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자신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음을 개탄했다. 은거 중에 편안하다 하였으나 마음 속에는 깊은 갈등이 있었다. 바로가기
이하응(발급), 신좌모(수취) 최익현의 상소로 양주 직곡에 은거하고 있던 대원군은 아들 고종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자신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음을 개탄했다. 은거 중에 편안하다 하였으나 마음 속에는 깊은 갈등이 있었다. 바로가기
06'개항기 감리인천항통상사무 엄세영의 편지'
1886년 엄세영 간찰
엄세영(발급)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이 개항(開港)된 뒤 개항 주변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증가하고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이와 관련된 사무와 통상 업무 등을 전담하기 위해 1883년(고종 20)에 제물포에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고 감리인천항통상사무를 임명하여 인천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면서 생긴 직책 으로 있던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엄세영이 춘궁기의 우환을 피력하고 다른 관직에 있던 상대의 소임을 격려하며 안부를 전했다. 바로가기
엄세영(발급)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원산·인천이 개항(開港)된 뒤 개항 주변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증가하고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이와 관련된 사무와 통상 업무 등을 전담하기 위해 1883년(고종 20)에 제물포에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고 감리인천항통상사무를 임명하여 인천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면서 생긴 직책 으로 있던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엄세영이 춘궁기의 우환을 피력하고 다른 관직에 있던 상대의 소임을 격려하며 안부를 전했다. 바로가기
07'위중한 아내의 치료를 위해 인삼값을 부탁하다.'
미상년 서만순 간찰
서만순(발급), 최준식(수취) 규장각대제와 안변군수 등을 역임한 서만순(徐晩淳, 1870~1950)이 위중한 아내의 치료를 위해 염치불구하고 인삼값을 부탁하며, 그 값을 치루기 위해 묘갈명이 필요한 이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다. 바로가기
서만순(발급), 최준식(수취) 규장각대제와 안변군수 등을 역임한 서만순(徐晩淳, 1870~1950)이 위중한 아내의 치료를 위해 염치불구하고 인삼값을 부탁하며, 그 값을 치루기 위해 묘갈명이 필요한 이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다. 바로가기
08'처남의 관직을 청탁하다.'
미상년 정헌시 간찰
정헌시(발급) 강릉군수를 지낸 정헌시(鄭憲時, 1847~?)는 상대가 관직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고, 처남의 과거합격을 청탁했다. 바로가기
정헌시(발급) 강릉군수를 지낸 정헌시(鄭憲時, 1847~?)는 상대가 관직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고, 처남의 과거합격을 청탁했다. 바로가기
09'사랑하나 도와줄 수 없다.'
1848년 위종선 간찰
위종선(발급), 심능규(수취) 강원도 양양 상운찰방으로 있던 위종선이 아름다운 시전지에 쓴 간찰을 보냈다. 사랑하나 도와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바로가기
위종선(발급), 심능규(수취) 강원도 양양 상운찰방으로 있던 위종선이 아름다운 시전지에 쓴 간찰을 보냈다. 사랑하나 도와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