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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이하응 간찰(李昰應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4_01_A00396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명숙공종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75년 이하응 간찰 / 李昰應 簡札
- ㆍ발급자
-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75년 6월 25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乙亥未月卄五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2.6 × 25.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직곡에서 운현궁으로 돌아온 직후의 대원군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을해년(1875) 6월 25일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신좌모(申佐模, 1799~1877)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대원군은 대단히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21일 雨中에 급히 행장을 꾸려 바삐 入京하여 雲峴宮에 돌아온 근황을 전해 주었다. 1874년(고종 11) 겨울부터 嶺南 儒林을 중심으로 준비기간을 거쳐 1875년 3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이른바 萬人疏가 전개되었다. 萬人疏의 논리는 대원군의 直谷 移去는 고종의 효심 부족 때문이니 고종이 효성을 다함으로써 대원군을 奉還하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伏閤上疏를 금지하고 萬人疏 주도세력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1875년 6월 18일에 4道 儒生들이 또 다시 伏閤上疏하자 고종은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는 傳敎를 내리기에 이른다. 자신의 奉還을 주장하던 儒生들이 위기에 내몰리자 대원군은 비를 무릅쓰고 운현궁에 돌아왔다. 곤경을 겪은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앞으로의 이해득실은 아직 헤아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百事가 이미 그르쳐지고 千法도 전도된 상황에서 자신은 入定한 승려처럼 언행을 극도로 삼가고 있다고 하였다. 直谷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雲峴宮으로 다시 돌아온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 · (연갑수,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그의 시대」,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2007)
참고자료
원문
淡人台執文座 春夏已序 阻音脩夐 只自夢想 卽惟文體萬重 邇來調將益旺 記下有萬不獲已而耳 卄一雨中 亟治行裝 忙忙入京 如前居之 回首往痕 一直是磨蝎之困 前頭之利害得失 姑未度之 然此百事已傾 千法又顚 如此之勢 復起成樣 不可言 而我則不言不笑不動不靜 姑爲入定 郍知葫蘆裏實甚羕 呵呵 適逢五衛將 暫付數行 謹報事狀 又探近節 統希道安 不備 照亮 乙亥未月卄五 雲下生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