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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D004_01_A00248_001
- ㆍ입수처
- 오죽헌 시립박물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01년 윤증 간찰 / 尹拯 簡札
- ㆍ발급자
-
윤증(尹拯, 1629~1714)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지역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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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급지역수취지역
- ㆍ발급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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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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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1크기 27 × 44.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신사년(1701) 8월 1일에 윤증(尹拯, 1629~1714)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신사년(1701) 8월 1일에 윤증(尹拯, 1629~1714)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損下’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평교간에 자신을 낮추는 겸사로 쓰인 말이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원폭과 함께 배접된 형태로 현전하는데, 원래 간찰첩 등의 형태로 제책되어 있던 것의 낙장으로 보인다. 피봉에는 발급자 정보로 단지 ‘謹謝狀上’이 기록되어 있다. 수신자 정보로 ‘老兄/白奉事 閑居史’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백(白)씨 성을 가진 봉사 벼슬을 지낸 이력이 있으면서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롭게 기거 중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와 교유했던 인물 가운데 서촌(西村) 백광서(白光瑞, 1638~1716)가 장흥봉사(長興奉事)를 역임한 이력이 있으므로 수신자를 그로 추정할 수 있다. 피봉의 하단 합금처에는 발급자의 수결(手決)과 함께 이 간찰을 삼가 봉한다는 의미의 ‘謹封’이 적혀있다. 이러한 결구(決句)와 수결 등은 일반적으로 서찰의 보안이나 신표의 기능을 한다.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야 비로소 송정보(宋正甫)가 지나는 편을 통해 한 통의 서찰을 부치게 되었는데, 오늘 상대의 하인이 일부러 보내신 서찰을 가지고 와서 잘 받았다고 했다. 더운 날씨에 기거가 맑고 복되시며, 가족들도 모두 질병은 없다는 점도 알게 되어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늙고 병든 상황은 겨우 이전대로 지내고 있지만 아이들의 병이 연달아 이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분수 밖에 임금의 은명을 받아 우리 부자가 모두 사직 상소를 올리게 되어 황공하고 민망하게 지내고 있다고 하면서, 상대가 한가하게 지내는 것만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어제 송 생을 통해 서찰을 부친 뒤 철 지난 부채를 받게 되어 포장 해 두고 보내려 했지만 인편이 없어 아쉬웠는데, 상대측 하인이 마침 와서 그 편에 별선(別扇) 1병, 당선(唐扇) 1병을 드린다고 했다. 이와 함께 보내는 별선과 당선 각각 1병씩은 지경(志卿) 부자에게 보내고자 한 것이니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붓 1자루와 먹 2개도 보내지만 시험에 쓰기에는 아마 부족하지 싶다고 했다. 가을이 오면 다시 찾아와 주겠다고 한 말씀은 기다리겠다고 하고, 보내준 절구시 3수는 병으로 화답하지 못해 부끄럽고 송구하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수발급자 간에 있었던 여러 일들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송정보’는 ‘정보(正甫)’가 자인 ‘송(宋)’ 아무개로 추정되며,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다만,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집(同春堂集)』 권17에 실린 「제서재종[정길]문[경진](祭庶再從[貞吉]文[庚辰])」과 이와 내용이 동일한 『동춘당속집(同春堂續集)』 권4에 실린 「제송정보[정길]문(祭宋正甫[貞吉]文)」을 참조하면 송준길의 서재종(庶再從)으로 이름은 송정길(宋貞吉)이고 경진년인 1640년 즈음에 사망한 인물이 나온다. 또한 송정길은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沙溪全書)』 권47 부록에 실린 「문인록(門人錄)」에 이름이 실려 있고, 이름 아래에 “은진인이다.【회덕(懷德)에 거주하였다.】[恩津人【居懷德】]”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이 송정보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본문에서 언급된 관직에 제수된 일과 부자가 사직상소를 올린 일에 관해서 『승정원일기』를 참조하면, 발급자는 1701년 7월 16일에 의정부좌찬성에 제수되지만 곧바로 충청감영을 통해 사직 상소를 올려 8월 7일경에 상소가 승정원을 통해 임금에게 올려졌다. 또한 그의 아들인 윤행교는 1701년 7월 3일에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었지만 그 역시 곧바로 충청감영을 통해 사직 상소를 올려 23일에 서울에 상소가 당도했음이 확인되므로 이 일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지경’은 『명재유고』 권36에 실린 「임천군수임공묘지명(林川郡守任公墓誌銘)」 및 여타 서간문들을 참조하면 이름은 임진창(任震昌, 1656~?), 자는 지경, 본관은 풍천이며, 임천군수를 지낸 임질(任耋, 1612~1676)의 여섯째아들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별선’이나 ‘당선’은 모두 부채의 일종으로 품질이 좋은 재료로 만든 부채와 중국식으로 만든 부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단오절이 되면 통상적으로 조정에서는 절선(節扇, 계절 부채)을 진상 받아 하사하였고, 이를 하사받은 관원이나 또는 지인을 통해 산지에서 직접 얻거나 구입한 부채를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준 사례가 많다. 이러한 관행은 주로 음력 중하(仲夏)인 5월부터 초가을 경까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급자 윤증은 자는 인경(仁卿)‧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부친은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이다. 형제로 윤추(尹推, 1632~1707), 윤발(尹撥), 윤졸(尹拙), 윤읍(尹挹) 등이 있고, 아들로 윤행교(尹行敎, 1661~1725), 윤충교(尹忠敎)가 있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등과 교유하였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탄옹(炭翁) 권시(權諰)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뒤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다가 후에 노소분당 때 소론의 영수로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제자로 체천(棣泉) 오수채(吳遂采), 서주(西州) 조하망(曺夏望), 심성희(沈聖希) 등이 있다. 천거로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서로 『명재유고』 등이 있다. 수신자 백광서는 자는 문옥(文玉), 호는 서촌(西村),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부친은 백홍윤(白弘胤)이다. 윤증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문인이다. 1663년(현종 4) 계묘 식년시 진사 3등 68위로 소과에 입격하였다. 이후 경기전참봉, 장흥고봉사를 역임한 이력이 있다.
- · 『承政院日記』 金長生, 『沙溪全書』 宋浚吉, 『同春堂集』‧『同春堂續集』 尹拯, 『明齋遺稿』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참고자료
제목 없음
老兄 謹謝狀上/白奉事 閑居史/[手決]謹封/【辛巳八月一】
昨纔因宋生正甫之過 付呈一書矣 卽者貴伻委至 忙披手翰 如獲一晤 慰豁何可言 況審暑熱以來 起居淸福 眷下俱無疾憂 好消息何以加此 此中 老病則僅如昨 而兒少病連綿 不可說 又有分外恩命 父子俱呈疏 惶悶殊不如兄之閑閑也 昨付書於宋生之後 得晩扇 封置欲送 而歎無速便矣 貴伻適至 可喜 別扇一柄 唐扇一柄呈似 又別一唐一 則欲送於志卿父子者也 幸傳之如何 筆一墨二呈似 而恐不足於試用也 餘萬在前書 秋來又有惠然之敎 企幸千萬 絶句三諷 而病未步和 愧悚愧悚 餘惟崇照 謹謝狀上 辛巳 八月 一日 損下 拯 頓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