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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D004_01_A00123_001
- ㆍ입수처
- 오죽헌 시립박물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99년 오연상 간찰 / 吳淵常 簡札
- ㆍ발급자
-
오연상(吳淵常, 1765~182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오재소(吳載紹, 1739~1811)
원문내용 從子추정 오연상의 숙부 오재유(吳載維), 오재소(吳載紹), 오재신(吳載紳) 중 한 명인데, 연대로 미루어 오재소로 판단됨.
- ㆍ지역정보
-
발급지역수취지역
- ㆍ발급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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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2월 27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己未 二月 二十七日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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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1크기 35.4 × 47.9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기미년(1799) 2월 27일 미시에 종자(從子) 오연상(吳淵常, 1765~1821)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기미년(1799) 2월 27일 미시에 종자(從子) 오연상(吳淵常, 1765~1821)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從子’라고 표현하여 조카가 숙부에게 보낸 간찰임을 알 수 있다. 별도의 피봉은 전해지지 않고, 배접된 상태로 현전하여 원래 간찰첩 등의 형태로 제책되어 있던 것의 낙장으로 보이며, 배접지는 계선이 인쇄된 공지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워하던 가운데 내려주신 서찰을 받고서 부임하신 뒤에 기체후가 편안하다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했다. 자신은 가족들 모두 편안하고, 아들의 천연두도 이미 나았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상대의 도임장(到任狀)을 가지고 온 자가 하루 전에 도착하여 오늘 낮에 이조(吏曹)에 전달되었다고 하였고, 교관(敎官) 형의 장지는 선영 국내의 동쪽 기슭으로 정해졌지만, 연운(年運)이 불리하여 일단 권폄(權窆)했음을 알렸다. 집안 사우(祠宇)를 이봉(移奉)하는 일은 택일단자를 보내드렸는데, 안현(安峴) 측의 반우제(返虞祭)가 이미 14일에 있을 것이어서 국로(國老)가 이미 모셔가려고 했다면 보름에는 출발했었을 것이지만 군색하고 절박한 염려가 있을 듯하다고 했다. 따라서 이날 오시에 요여에 봉안하였다가 16일 상간에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근촌(謹村) 측은 별 탈 없이 공부에 전일하고 있고, 땔나무와 음식에 관한 일은 상대가 분부한 대로 전달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모레쯤 선산으로 출발했다가 다음달 3일에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라는 점도 알렸다. 다음 인편이 있다고 들어서 이만 줄이겠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수발급자의 주변에서 일어난 근황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발급자 오연상의 부친은 무위재(無爲齋) 오진주(吳晋周, 1680~1724)의 손자 일재(一齋) 오재륜(吳載綸, 1731~1771), 생부는 취몽헌(醉夢軒) 오태주(吳泰周, 1668~1716)의 손자 순암(醇庵)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이다. 따라서 그가 숙부로 호칭할 수 있는 인물은 본생가의 운초(雲樵) 오재유(吳載維, 1729~1764, 오원(吳瑗)의 아들이자 오재순‧오재소와 형제로서 뒤에 오진주의 아들 오완(吳琬)에 입계함)와 석천(石泉) 오재소(吳載紹, 1739~1811), 양가(養家)의 오재신(吳載紳, 1739~?)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오재유는 양지현감(陽智縣監)이나 진산군수(珍山郡守) 등 지방관을 역임한 이력이 있지만 몰년이 이 간찰의 발급연도와 맞지 않고, 오재신은 몰년은 미상이나 『승정원일기』 1790년 3월 22일 기사의 유생 연명상소에 ‘유학(幼學)’의 직역으로 연서되어 있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면 별다른 관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재소의 경우는 1799년 2월 9일에 안동부사에 제수된 이력이 있는데, 본문 가운데서도 상대의 ‘도임(到任)’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급자는 오재소이고 이 간찰이 발급된 때에는 그가 안동부사로서 부임한 뒤인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본문에서 언급된 ‘교관 형’은 발급자와 동항이면서 교관 벼슬을 지내고 이 해에 사망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운초 오재유의 아들 오서상(吳敍常, 1761~1799)이 1797년 12월 20일에 동몽교관에 제수된 이력이 확인되고, 몰년이 간찰 발급 연도와 같은 1799년이므로 오서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나 미상이다. 또한 ‘국로’는 발급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어느 인물의 자로 추정되는데, 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의 손자이자 오재소의 사위 이재수(李在秀, 1770~1822)의 자가 ‘신로(新老)’이지만 동일인물 여부는 미상이다.
발급자 오연상은 자는 사묵(士默), 호는 약암(約菴),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800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1811년에는 영변부사 재직 시 홍경래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이후 예조참판·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약암집》이 있다.
- · 『承政院日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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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慕中 伏承下書 謹伏審到任後 氣體候萬安 伏慰區區 無任下誠 從子 渾閤均安 兒痘亦已送神 此幸何達 到任狀持者 能先一日來到 今午已傳之吏曹 可幸耳 敎官兄葬地 定於先塋局內東麓 而以年運不利 權厝于居傍云耳 祠宇移奉 擇單呈覽 而安峴返虞 旣在十四 而國老旣欲陪往 則望日離發 似爲窘迫之慮 伊日午時 奉安于腰轝 十六間當治發 未知如何 謹村無恙 課讀亦專一耳 柴饍事 當依敎傳之耳 從子 再明欲發楸行 來初三日還家計耳 聞有明便 此姑不備 伏惟下鑒 上答書 己未 二月 二十七日 未時 從子 淵常 上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