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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D004_01_A00116_001
- ㆍ입수처
- 오죽헌 시립박물관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40년 오수원 간찰 /
- ㆍ발급자
-
오수원(吳遂元, 1682~?)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지역정보
-
발급지역수취지역
- ㆍ발급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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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년 6월 4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庚申 六月 四日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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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1크기 35.2 × 49.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경신년(1740) 6월 4일에 오수원(吳遂元, 1682~?)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경신년(1740) 6월 4일에 오수원(吳遂元, 1682~?)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스스로 ‘服人’이라고 표현하여 복상(服喪) 중인 상태를 나타내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원폭과 함께 배접된 형태로 현전하는데, 원래 간찰첩 등의 형태로 제책되어 있던 것의 낙장으로 보인다. 피봉에는 발급자 정보로 ‘벽정에서 보내는 서간’이라는 의미인 ‘碧亭柬’이 기록되어 있다. 수신자 정보로 ‘鰲山 梧桐村 高生員宅 卽傳’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수신자는 생원시에 입격한 고씨 성의 미상인이고 거주지는 오산 오동촌이라는 곳임을 알 수 있지만 본문 내용만으로는 미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오산은 경상도 흥해군‧청도군, 전라도 장성현‧강진현 등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상단 봉함처에 답인된 인장은 흑색 방형의 형태로서 비정형 무늬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불교와 관련된 “卍”자가 있으며 정확한 인문을 확인하기 어렵다. 하단 합금처에는 발급자의 수결과 함께 “머리를 조아린다”라는 의미의 ‘頓’이 적혀있다. 이러한 봉함인 또는 결구(決句)‧수결 등은 일반적으로 서찰의 보안이나 신표의 기능을 한다. 피봉의 가운데에는 ‘此去泥場書封 卽傳無滯 如何’라는 문장이 추기되어 있는데, 뜻은 “이번에 보내는 니장(泥場)의 서찰은 곧바로 전달하고 지체하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이다. ‘니장’은 전라도 광주(光州) 소재의 지명으로 추정된다. 즉 이 서찰과 함께 니장으로 가는 서찰을 동봉하여 부치는 것이므로 이러한 언급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산’은 전라도 장성이나 강진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상대가 손수 쓰신 서찰을 받아서 지금까지 마음이 시원하고 위로된다고 했다. 오늘 여름비가 내리는 이때에 고요히 기거하시는 체리가 어떠하신지 묻고, 영외(嶺外)를 따라 돌아와 여독이 매우 심할 것인데, 듣기에 좌우께서 근래에 사뭇 세상사는 재미가 있어서 서울로 올라올 뜻이 없다고 하니 비록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하더라도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김양덕(金陽德)이 지난번 남쪽을 경유해 돌아와 상대의 거처와 음식, 범백이 모두 옛날 모습이 아니라는 점을 상세히 전달 해 주어 더욱 기쁘다고 했다. 강재빈(姜在賓)은 바다로 가서 고생하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게 들렀다 갔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고 했다. 그가 돌아가는 편을 통해 대략 안부를 전하고, 또 그가 그의 친족들에게 인사하려는 것 때문에 청암찰방(靑巖察訪)에게서 응교(應敎)의 편지를 받아 가니, 좌우께서 또한 조언을 해 주어 그를 성취하게 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당시 발급자와 수신자의 근황이나 당시 서신 왕래, 인사 청탁 등의 관행에 관한 실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김양덕과 강재빈은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나 수발급자와 매우 가까운 사이의 인물로 보인다. 특히 강재빈의 경우는 응교의 편지를 받아 가는 일을 통해 편지 전달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인사 시키려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응교는 이 편지가 발급된 1740년에 응교에 제수된 아우 체천(棣泉) 오수채(吳遂采)로 추정된다. 또한 피봉에서 언급된 ‘니장으로 가는 편지’가 바로 강재빈이 별도로 들고 가는 응교의 편지이고, 청암역(靑巖驛)은 나주에 설치된 역관으로서 광주와 지근거리이므로 상대가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강진 또는 장흥과 함께 활동 반경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발급자 오수원은 자는 자장(子章),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부친은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이고, 형제로 오수욱(吳遂郁), 오수엽(吳遂燁), 오수채가 있다. 1699년(숙종 25) 기묘 증광시 생원 3등 70위로 소과에 입격하고, 1712년(숙종 38) 임진 정시 을과(乙科) 2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가주서에 제수되었는데, 임진 정시의 시관이었던 이돈(李墩)이 임금의 패초를 받고 궁에 들어왔다가 무단으로 출궁하여 오수원의 집에 들른 뒤 오수원이 좋은 성적으로 급제했다는 사유로 대간의 의론이 들끓자 결국 삭과(削科)되고 양재역(良才驛)에 도배되었다. 이후 1723년이 되어서야 복과되어 다시 가주서, 전적, 예조좌랑, 지평, 부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 · 『承政院日記』 김효경,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참고자료
제목 없음
鰲山 梧桐村 高生員宅 卽傳 【此去泥場書封 卽傳無滯 如何】/ 碧亭柬/ [黑文印][手決]頓
頃承手畢 至今披慰 卽日夏雨 靜履如何 顧此從嶺外還 憊劣特甚無可言 聞左右近頗生滋味於生理 無意上京云 雖會面之疏爲可歎 亦未必非好消息耳 金陽德頃自南還 傳尊邊語甚詳居處飮食 凡百非舊日貌樣 聞之尤覺喜甚 姜在賓往海辛勤來訪而還 其意可尙 其歸略申 且渠以其嗣族人事 得應敎書於靑巖督郵而去 左右亦須助言成就之 如何 忙擾只此 不宣 庚申 六月 四日 服人 遂元 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