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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B017_01_A00250_001
- ㆍ입수처
- 김영유(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20년 윤광렬 간찰 / 尹匡烈 簡札
- ㆍ발급자
-
윤광렬(尹匡烈, 1763~1833,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미상인(~?,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20년 9월 28일간지연도: 庚辰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2.7 × 52.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경진년(1820) 9월 28일에 기말(記末) 윤광렬(尹匡烈, 1763~1833)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경진년(1820) 9월 28일에 기말(記末) 윤광렬(尹匡烈, 1763~1833)이 미상인과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記末’로 표현하여 평교간으로서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사이로 추정된다. 별도의 피봉은 전해지지 않는다.
봄 상간에 상대 형제분들이 함께 왕림 해 주신 일은 여태 위로된다고 하였다. 초한(初寒)의 날씨에 상대와 형제분들의 안부는 연일 좋은지 묻고는 그립다고 했다. 자신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분주하게 지냈고, 그 사이에 근친(覲親) 행을 갔다가 일전에야 비로소 돌아오게 되었는데 여독이 매우 심하다고 했다. 자신이 있는 해읍의 산물은 어류(魚類)에 지나지 않는데, 아마도 상대측의 경우는 모과[木果]와 홍시(紅柿)가 제철을 맞이했을 테지만 멀리 있어서 얻을 길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가을 상간에 인편을 통해 건시(乾柿)와 모과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면서 감의 경우 건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말려서 쓰겠다고 했다. 조만간에 상대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추록에는 차[茶] 1봉, 붓 3자루를 함께 보낸다고 하였다.
발급자 ‘광렬’은 이름만 기재되어 정확한 성씨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동 문중 소장간찰 가운데 윤치규(尹致逵, 尹致膺의 초명) 발급 간찰이 있고, 윤치규의 부친이 강릉부사를 역임한 석유(石囿) 윤명렬(尹命烈, 1762~1832)임을 감안하여 해평 윤씨 문중과의 교유가 있었다면, 광렬 역시 ‘윤광렬’일 가능성이 있다. 『해평윤씨대동보』에 의하면 윤광렬은 도재공파(陶齋 尹昕, 尹斗壽의 次子)계의 20세손, 윤명렬은 치천공파(稚川 尹昉, 尹斗壽의 長子)계의 20세손으로 이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아랫대로 갈라져 내려온 종반 항렬의 친족관계이다. 윤광렬은 자는 사일(士一), 본관은 해평(海平), 부친은 윤수동(尹秀東), 생부는 윤영동(尹英東)이다. 1790년(정조 14) 경술 증광시 진사 2등 14위로 입격하였고, 음직으로 장릉참봉(莊陵參奉)‧형조좌랑‧문화현령(文化縣令)‧고성군수(高城郡守)‧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영천군수(榮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이 간찰이 발급된 해에 윤광렬은 고성군수에 부임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자신의 소재처에 대해 “이 해읍의 산물[此海處所産]”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성의 산물은 어류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상대가 거주한 강릉 지역은 해산물뿐만 아니라 모과나 감과 같은 물종도 특산물로 유명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당시 지역의 특산물에 관한 정보, 같은 도내에 소속된 지역 간 소요되는 관수품의 왕래 및 물품을 주고받던 풍습이나 관행 등을 엿볼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江陵府使先生案』
참고자료
원문
春間聯枉 迨慰 卽惟初寒 棣候連重 遠溯區區 記末 自夏至秋 撓汨度了 間作覲行 日前纔還 憊甚奈何 此海處所産 不過魚屬 而竊想那中木瓜紅柿 正當其時 無以得當 遠莫致之 奈何 秋間得送人之約 故玆因便送之 乾柿與木瓜得送 如何 雖未乾 自當乾用耳 早晩如作那中行 可以奉敍 姑留 不宣式 庚辰 九月 二十八日 記末 匡烈 頓 一封茶 三枝筆 伴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