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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B017_01_A00245_001
- ㆍ입수처
- 김영유(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최돈봉 간찰 / 崔燉鳳 簡札
- ㆍ발급자
-
최돈봉(崔燉鳳, 1881~191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미상인(?~?,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미상년 7월 22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 1916-1917 사이 추정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17.2 × 34.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미상년(1916-1917 사이 추정) 7월[梧秋] 22일에 죄제(罪弟) 최돈봉(崔燉鳳, 1881~1918)이 미상인과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미상년(1916-1917 사이 추정) 7월[梧秋] 22일에 죄제(罪弟) 최돈봉(崔燉鳳, 1881~1918)이 미상인과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罪弟’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 상대와 평교간이면서 친상(親喪)을 당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피봉은 전해지지 않는다.
앞부분은 결락이 심하여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상대측의 안부와 근황에 관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고, 상대의 어떠한 일은 실패[落莫]한 탄식이 많을 것이라고 하며 대신 고민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질긴 목숨 연명하며 지내는 상황은 여전하다고 하고 아이들이 탈은 면한 것이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농작의 경우는 수해를 입은 것이 적지는 않지만 완전히 흉작이 된 이들에 비하면 소득이 많다고 하였다. 아들과 종형제들이 이번에 상대에게 갔다가 제 자형과 함께 돌아오고자 한다고 하니 부디 함께 보내 주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했다. 장마의 뒤끝에 나루를 건너는 일이 매우 염려된다고 하면서 건장한 사람을 시켜 그들을 보호하여 잘 건너게 해 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발급자 최돈봉은 『강릉최씨대동보』 권3 용연동파(龍淵洞派)에서 확인되는 ‘윤기(允杞)-영찬(永瓚)-경집(慶集)’으로 이어지는 동명인으로 추정된다. 초휘는 돈식(燉軾), 자는 응소(應韶), 호는 우파(又坡)‧오파(梧坡), 배위는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연용(金演鎔)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이 강릉 김씨 김두남(金斗南)의 아들 김덕래(金德來)와 혼인하여 슬하에 김재홍(金載泓)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이것이 만일 맞는다면 수신자는 김두남, 사위는 김덕래로 볼 수 있고, 본문에서 언급된 ‘아들과 종형제의 자형’ 또한 누이의 남편인 김덕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최돈봉의 3남은 각각 최규창(崔圭昌), 최규면(崔圭冕), 최규황(崔圭晃)인데, 막내 최규황의 생년이 1916년이어서 당시 갓난아이였을 것이므로, 상대측으로 간 아들은 맏이인 최규창과 둘째 최규면 및 이들의 종형제로 볼 수 있다. 또한 발급자는 당시 삼년상을 치르는 과정이었기에 스스로를 “죄제”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부친인 경파(鏡坡) 최경집(崔慶集, 1853~1915)의 몰년이 을묘년인 1915년이고, 딸의 혼사가 논의되고 이루어진 해가 1916년으로 본다면 발급연도는 1916년에서 삼년상 이전인 1917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 · 『江陵崔氏大同譜』, 한국학자료센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참고자료
원문
■…■多落莫之歎■(矣)■…■代悶 罪弟 一樣前■■頑 而惟幸兒曺免警耳 所謂農作 沉者潰者 雖曰不少 比諸全手掃如者 所得多矣 家兒從昆季之此行 欲與渠姊兄共回云 幸須聯袂命送 如何 潦餘野渡 極爲關慮 則使壯健人 護之利涉 千萬千萬 餘迷不備疏 梧秋 念二日 罪弟 崔燉鳳 拜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