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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B017_01_A00242_001
- ㆍ입수처
- 김영유(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919년 서병의 간찰 / 徐丙懿 簡札
- ㆍ발급자
-
서병의(徐丙懿, ?~?,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미상인(?~?,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919년 2월 6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4 × 32.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대정 8년(己未, 1919) 2월 6일에 제(弟) 서병의(徐丙懿)가 미상인과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대정 8년(己未, 1919) 2월 6일에 제(弟) 서병의(徐丙懿)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弟’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 상대와 평교간임을 알 수 있다. 별도의 피봉은 전해지지 않는다.
요즈음 어버이 모시며 지내는 상대의 체후와 가정 내 가족들의 제절이 좋은지 안부를 묻고 그립다고 했다. 자신은 어버이 모시며 지내는 근황이 여전하고 병든 기운도 쾌차하여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다만 어제 자신의 부친이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에 김익남(金翼南)이 양력 1월 24,5일경부터 크게 아파서 같은 달 26,7일 경까지 약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이로서 넓은 마음으로 양해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간찰은 본문에서 언급된 ‘김익남’이 발급한 번 <미상년(1918 추정) 8월 4일> 간찰, 번 <기미년(1919) 1월 2일> 간찰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231번> 간찰은 발급자가 당시 강원도 춘천 소재의 ‘강원도잠업강습소(江原道蠶業講習所)’에서 자신의 동학들과 강습생 신분으로 수학하고 있었거나 또는 동 강습소와 연계된 치잠공동사육소(稚蠶共同飼育所)나 성견공동판매조합(成繭共同販賣組合)과 같은 사업소에 동료들과 취업해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232번> 간찰 역시 새해가 되었음에서 귀가하지 못한 채 타군에서 동료들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정황을 알려준다. 이를 종합하면, 간찰의 발급 시기는 순서대로 <231번>-<232번>-<242번>으로 이어지며, 김익남은 1918년 가을경 본가에 들러 수신자인 사형과 함께 있다가 다시 자신이 있던 강습소로 돌아온 것이 8월 4일 즈음이 되고, 이후 1919년 1월 2일에는 사형에게 새해의 안부 인사를 보내면서 객지에서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는 상황을 알렸지만, 1월 24일부터 병이 나서 27일경까지 약을 복용했지만 낫지 않자 2월 6일에 강습소의 임원으로 추정되는 서병의의 부친이 서병의를 통해 이 사실을 본가에 알리게 된 일련의 정황들을 연계하여 유추할 수 있다.
발급자 서병의는 자세한 이력은 미상이다. 다만 1922년도 『조선총독부직원록』 「지방관서‧강원도」의 강릉군청 소속에 동명의 인물이 확인된다. 그는 도지방비이원(道地方費吏員)으로서 관등 11등 ‘산업기수보(産業技手補)’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본문에서 언급된 김익남은 강릉 김씨 문중 일원으로서 여타 간찰들에 등장하는 김두남(金斗南), 김용남(金容南) 등과 동항의 형제 또는 종반관계로 추정된다.
이 간찰은 계선이 인쇄된 규격화 된 종이에 작성되었는데, 판심의 바로 우측 난외(欄外)에 “第○○丁”이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이는 페이지 수를 기록하기 위해 남겨둔 공란으로서 ‘정(丁)’은 종이의 낱장 수를 나타내는 ‘쵸[ちょう]’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때 통용된 규격 용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간찰은 내용적 측면에서 전형적인 안부 편지로서 기두‧후문(候問, 상대의 안부)‧자서(自敍, 자신의 근황)‧술사(述事, 본론)‧결사의 투식이 고루 갖춰져 있어 서간문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국한문이 혼용된 근대시기 간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에서 “病氣决次”의 ‘决次’은 문맥상 ‘快差’의 오기로 볼 수 있다.
- · 「朝鮮總督府官報」 <大正2年(1913) 3月 11日>(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朝鮮總督府職員錄』 <1922> 「地方官署‧江原道」(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金孝京,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朴大鉉,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참고자료
원문
謹詢伊來 侍體候萬康 宅內諸節이 亦得均吉否아 仰溸且祝 弟 省狀이 如前ᄒᆞ옵고 病氣决次ᄒᆞ오니 是爲大幸耳 第昨日弟之父親下書가 有ᄒᆞ엿ᄂᆞᆫᄃᆡ 金翼南이가 陽正月二十四五日頃브터 大痛ᄒᆞ야 仝二十六七日頃ᄭᆞ지 用藥中이나 顯效가 無ᄒᆞ다ᄒᆞ엿스니 以是海諒 如何 餘不備禮 大正八年 二月 六日 弟 徐丙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