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B017_01_A00227_001
- ㆍ입수처
- 김영유(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최돈봉 간찰 / 崔燉鳳 簡札
- ㆍ발급자
-
최돈봉(崔燉鳳, 1881~1918,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미상인(?~?,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미상년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 병진년 1916년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18.5 × 40.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미상년(병진년 1916년 추정) 가을 즉일에 죄제(罪弟) 최돈봉(崔燉鳳, 1881~1918)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미상년(병진년 1916년 추정) 가을 즉일에 죄제(罪弟) 최돈봉(崔燉鳳, 1881~1918)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罪弟’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 상대와 평교간이면서 친상(親喪)을 당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피봉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떠한 일에 관해, 흉년이 들고 매우 분주한 가운데 겨를이 없어 무익한 일임을 언급한 뒤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하였다. 자신은 질긴 목숨 연명하며 지내는 모습이 여전하다고 했다. 이전 편지에서 상대가 말씀해 준 일은 감사하다고 하며 비록 뒤에 탐문할 계획이긴 하지만 길을 얻기 쉽지 않다고 하였다. 가을빛이 완연한 이때는 세속에서 혼사[衣籠之行]를 치르기에 마침 좋은 시기임을 언급하며, 자신의 여식은 가난한 집안[綠窓] 소생이므로 연포 치마[練裳]와 대상자[竹笥]를 일찍부터 준비 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전날 면대했을 적에 간청 드린 일은 정세를 헤아려 보셨을 것이라고 하였고, 『학해(學解)』를 그대로 올려드린다고 하였다.
본문에서 전반부에서 언급한 어떠한 일은 결락으로 인해 파악할 수 없다. 상대의 안부에 관한 내용과 함께 상대측에서 발생한 어떠한 일에 관해 발급자의 의견을 이야기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상대가 편지에서 언급한 일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어느 집안 또는 사람과 인맥을 형성하고자 부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롱의 행차’에 관한 언급은 발급자의 여식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연상과 죽사를 준비했다’고 하는 말을 통해 당시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가을이 완연한 이때가 혼사를 치르기 좋은 때’임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연상과 죽사는 중국 후한(後漢)의 은사(隱士) 대양(戴良)이 가난하여 딸들을 시집보낼 때 연상, 포피(布被), 죽사, 목리(木履)를 만들어 보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말미에 언급된 ‘학해’는 『대학해(大學解)』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사인들이 관계망을 형성하고자 했던 관행이나 관혼상제 관련한 당시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이 간찰은 번 <병○년 11월 14일 최돈봉(崔燉鳳) 간찰>과 내용상 일괄문서로 파악해야 한다. 발급 시기로 보면 이 간찰은 발급 연월일은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 가운데 “秋色堂堂”이라는 말을 통해 가을경이었음을 알 수 있고, <병○년 간찰>의 경우 연도는 여타 정황상 병진년인 1916으로 추정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1916년도에 발급자의 딸과 수신자의 아들의 혼사가 추진되던 가운데 발급자는 이 해의 가을경에 혼사를 치르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가 무산된 듯하고, 다시 11월 14일에는 신부 측에서 같은 달 19일로 길일을 잡았지만 신랑 측에서 17일 또는 간지에 ‘午’가 들어가는 날이 길일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여 이른바 마택(磨擇) 한 상황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번 <무오년(1918) 11월 18일 최돈항(崔燉恒) 간찰>, 번 <무○년(1918) 11월 22일 최영국(崔永國) 간찰>, 번 <기미년(1919) 1월 7일 최영국(崔永國)> 간찰에서 언급된 ‘수신자 측의 며느리[令婦阿從媳, 令子婦]’는 여타 정황상 최돈봉의 딸로 추정되므로 1918년에는 이미 혼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발급자 최돈봉은 『강릉최씨대동보』 권3 용연동파에서 ‘윤기(允杞)-영찬(永瓚)-경집(慶集)’으로 이어지는 동명인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의 부친인 경파(鏡坡) 최경집(崔慶集, 1853~1915)의 몰년이 을묘년인 1915년이므로, 발급자는 당시 삼년상을 치르는 과정이었기에 “죄제”라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족보에 기재된 최돈봉은 초휘는 돈식(燉軾), 자는 응소(應韶), 호는 우파(又坡)‧오파(梧坡), 배위는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연용(金演鎔)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이 강릉 김씨 김두남(金斗南)의 아들 김덕래(金德來)와 혼인하여 슬하에 김재홍(金載泓)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이것이 만일 맞는다면 수신자는 김두남으로 볼 수 있다.
- · 『江陵崔氏大同譜』 한국학자료센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참고자료
원문
■…■ 此年事云儉 又■…■(極)擾中 使莫暇■…■擧 此無益之事 ■■(旋切)未安也 罪弟 頑狀與諸他一如昨已耳 示事感謝 而雖欲從后探的爲計 似難得其路耳 秋色堂堂 世俗衣籠之行 正値其時 而迷媳則顧此綠窓所生 練裳竹笥 嘗費經營而已 前日面所懇囑 庶或俯此情勢 學解依呈耳 餘擾甚迷 不備 敬疏謝 卽旋 罪弟 崔燉鳳 謝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