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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B017_01_A00173_001
- ㆍ입수처
- 김영유(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01 조흥진 간찰 / 趙興鎭 簡札
- ㆍ발급자
-
조흥진(趙興鎭, 1748~1814,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미상인(?~?,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01년 7월 17일간지연도: 辛酉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9.2 × 5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신유년(1801) 7월 17일 조흥진(趙興鎭)이 보낸 농사에 대해 물어보고, 보내준 선물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신유년(1801) 7월 17일 흥진(興鎭)이 보낸 농사에 대해 물어보고, 보내준 선물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간찰이다. 편지의 내용은 그립던 차에 편지를 받고 만난 듯이 기뻤다고 하면서 전에 없었던 더위에 상대가 잘 지내고 있어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가뭄이 매우 혹심함에 영동(嶺東)이 흉년은 면치 못했다고 하니 생활이 힘들 것으로 생각되므로 근심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흥진 자신은 이전대로 한가히 지낸다고 안부를 전했다. 단지 수령이 된지 3년 동안 특별한 선정(善政)이 없이 봉름만 축내서 부끄럽다고 하였다. 상대가 보내준 해산물은 잘 받았으므로 매우 감사하다고 전하는 내용이다.
『승정원일기』에 흥진이란 이름에 3년 동안 고을 수령을 담당한 사람을 찾아보면 조흥진(趙興鎭)과 윤흥진(尹興鎭)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 강릉과 관련 있는 인물은 1799년 2월 5일~1801년 7월 22일까지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역임했던 조흥진이다. 그러므로 연도는 1801년 신유년임을 알 수 있겠다. 조흥진(1748~1814)은 본관은 풍양(豊壤), 자 수보(秀甫), 시호 숙정(肅靜), 충헌(忠獻)이다. 조부는 조석명(趙錫命)이고, 부친은 조재세(趙載世)이며, 모친은 이현보(李玄輔)의 딸이다. 백부 조재임(趙載任)에게 입양되었다. 17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780년 가주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이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을 모아 의주를 굳게 지켜 전공을 세웠다. 한성부우윤·부총관을 역임하고, 사후에 이조판서, 이어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수신지 반암(盤巖)은 B017_01_A00179_001번에 강원도 강릉이라고 나오고, 발신지 청교(淸橋)는 청자교(淸字橋)로써 서울 중구 을지로 5가에 소재한다.
원문
盤巖 侍案 回納
淸橋 謝狀
別懷耿耿, 卽於便中, 獲承惠牘, 區區欣倒, 如得一握. 而矧審無前炎熱, 侍彩安重, 尤庸慰豁之至. 而第旱災孔酷, 嶺以東將未免凶歉云. 食土之家, 生活必將艱辛, 奉慮萬萬. 僕歸後依舊作閑身, 良覺浩然. 而但念作宰三載, 無一善政, 徒費廩俸, 自顧愧恧, 奈何奈何. 惠送魚藿, 依領珍謝. 而此等物覓付, 可知其難便, 何不以空簡爲之耶. 秋科必摘, 戾洛以爲相面之地, 區區之企也. 一把送之, 領之也. 萬萬擾甚, 宣狀式. 辛七月十七日, 興鎭 頓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