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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자료ID
- B017_01_A00097_001
- ㆍ입수처
- 강릉김씨 노가니 김진사댁(김영유)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10 윤치영 간찰 / 簡札
- ㆍ발급자
-
윤치영(尹致永, 1764~?, 조선,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미상인(?~?, 개인)
원문내용추정
- ㆍ지역정보
-
발급지역수취지역
- ㆍ발급시기
-
1810년 7월 26일간지연도 庚午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6 × 4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인문판독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경오년(1810) 7월 26일에 기복인(朞服人) 윤치영(尹致永, 1764~?)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경오년(1810) 7월 26일에 기복인(朞服人) 윤치영(尹致永, 1764~?)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한 관계호칭 용어를 생략하고 ‘朞服人’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 상대와 평교간이면서 당시 기년 복상(服喪)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美洞 尹正言 謝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서울의 미동(美洞)에 거주하고 있고, 정언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江陵 盤巖 金生員宅 回納’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반암(盤巖)에 거주하고 생원시에 입격했음을 알 수 있는데, 동 문중 소장의 동일 수신자의 간찰들을 참조하면 그는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직을 맡았던 이력이 있었다.
상대와 오래 소식이 격조하여 서로 잊은 처지가 되었지만 늘 그리웠다고 하면서, 자신은 환시(還侍)하라는 은전(恩典)을 입어 가족이 서로 만나게 되었고, 어린 자식도 약간의 성취가 있어 영광이지만, 봄에 선달(先達) 서제(庶弟)의 상을 당하여 노친께서 자신의 이목과 수족을 대신 해 줄 사람이 없게 된 상황에 참통한 심경이며, 고향 선산을 다닌 뒤 어버이는 평안히 잘 돌아 오셨으나 자신은 장기(瘴氣)에 걸려 고생한 일 등의 상황을 알렸다. 상대의 부탁은, 요즘 세상에 패장(敗將)과 같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여론을 봐 가며 행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 애석하게 느끼는 점은, 바다 모퉁이의 좋은 곳에 살면서 무슨 말 한마디를 더하고 덜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천하만사는 천지신명이 도와주는 대로 해 나갈 뿐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언급된 환시의 은전을 입었다는 말은 당시 윤형렬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찬배되었다가 풀려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1806년 6월경에 지평 윤형렬(尹亨烈)이 상소하여 한용귀가 김달순에게 서찰로 흉언을 하도록 권했다고 주장했다가 무함했다는 죄명으로 찬배된 일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시 의금부에 나추되어 신문을 받고 공초하면서 윤치영이 이 상소에 깊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져 윤치영 역시 죄를 입어 웅천현(熊川縣) 가덕도로 찬배되었고, 1807년 5월에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으며, 다시 1809년 8월에 방면된 일이 있었다.
또한 본문의 주된 내용은 안부를 주고받는 것 외에 주된 내용은 상대의 부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상대의 부탁은 본문만 봐서는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정황상 수신자는 발신자를 통해 제3자에게 무언가를 청탁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청탁 관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급자 윤치영은 자는 계문(季文), 본관은 해평(海平), 부친은 강릉부사를 역임한 윤장렬(尹長烈)이다. 1794년(정조 18) 갑인 정시 병과 28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가주서‧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805년 4월 2일에 제수되어 같은 해 윤6월 25일에 지평에 제수되기 전까지 정언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