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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B005_01_A00158_001
- ㆍ입수처
- 천보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최동길 간찰 / 崔東吉 簡札
- ㆍ발급자
-
최동길(崔東吉, ?~?)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914년 11월 3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甲寅十一月三日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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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크기: 26.8 × 118.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최동길이 작성한 문서이다. 강릉최씨 崔文漢의 생애와 향현사 건립에 필요한 경비마련 등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간찰을 보낼때의 별지로 보인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이 문건은 동길(東吉)이 삼가 두 손 모아 문회(門會) 자리에서 첨종(僉宗) 좌하(座下)에 올리는 장문의 건의문이다. 작성 시기는 말미의 갑인년(1914) 11월 3일 표기에 따른다.발신자는 먼저 종중이 선조의 사업을 이어가야 하며,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이 적지 않음에도, 종중 내에 이를 일으키려는 마음이 부족하여 점차 쇠미해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개성(松京)의 표절사(表節祠)와 두문동(杜門洞) 칠현(七賢) 제향의 사례를 들어, 우리 시조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 역시 고려 말 혁명기에 자호(自號)를 충재라 하고 송경에서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으므로, 그 절개와 고고한 행적은 두문동 육은(六隱)과 칠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발신자는 『송도지(松都誌)』·『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고려전찬(高麗傳贊)』 등에 기록된 두문동 관련 기사와, 영묘(英廟)·정묘(正廟)·순조(純祖) 연간에 있었던 표절사 제향 추증 사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 특히 개성유수(開城留守)와 예조(禮曹)가 “성명만 밝혀지면 차례로 추향(追享)할 수 있다”는 회답을 내린 전례를 들어, 충재 선생의 표절사 제향 추진이 어렵지 않음에도 종중 자손들이 이를 움직이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과거에 향현사(鄕賢祠) 추향 논의 때 타 문중은 적극적으로 조상을 제향에 올렸으나, 우리 종중은 미온적 태도로 일관해 오히려 수모를 당한 일을 예로 들었다. 종중의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여 매년 일정 수입이 있고, 이번 제향 운동에는 1백여 원 정도면 충분하므로, 젊고 유능한 인물 몇 명을 선발해 주도적으로 추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일의 구체적 절차와 세목은 차후에 알리겠다며, 종중의 만전(萬全)한 협의와 실행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 문건은 조선 후기·대한제국기 문중 사회에서 선조의 절의를 기려 사우(祠宇)에 추향하고자 한 실제 운동 계획과 그 논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두문동 제향 제도의 운영 방식, 지방 사족층의 역사 인식, 문중 재정 운용 실태를 파악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자료이다.
원문
東吉 齋沐頓首 謹拜致敬書于門會 僉宗座下
竊伏惟 吾宗之於爲先事業 不可廢置 而期於可爲
者 不止一二也 然環顧吾宗中 雖夢中譫囈 無一
念及於此 此乃吾宗中 無振起之心 自分必落轉於
委靡之程故也 敢此陳狂瞽之論 極知其妄率
無用如楚和三刖之璞 齊客三年之瑟 然數十
年以來 胸中所蓄未遑之事 終不能泯默 伏
惟僉宗 叱嗔後憑軾 而一睨焉 蓋松京表節祠 卽
杜門洞七賢腏享之所也 杜門洞諸賢 分散各處之後
姓名不傳於世 故止享其姓名之闡出七賢 非七賢以外
不可躋享者也 惟我始祖忠齋先生 革命之際 自
號忠齋 自松京遁于是邦 潛光秘跡 而吾宗▢▢▢
承襲之語 旣有杜門洞後來 杜門洞錄 雖出於不▢
野史 然先生之名號 亦在其中 則先生之貞忠卓節/
風霜孤操 何可少讓於六隱七賢哉 至于▢▢▢
而泯滅無傳焉 斂袵感思 不勝慨然長歎也 今▢
不朝峴碑 松都誌杜門洞記 高麗名臣傳 高麗▢▢
傳贊 則皆歎其杜門洞諸人 爲其所當爲 名湮沒無▢▢
云云 松都誌曰 運訖蒼黃之際 西遯者不止七十二▢▢
藏者 非特四十八 而畢竟相守 而循節者 止於此數
耶云云 松都誌又曰 聖居山下 有八判寺洞 麗臣八人 共
匿此所 至今有洗心井 會盟坮之稱 而姓名俱不傳云云
忠齋先生官銜 亦有判軍器寺 則亦豈非初入八判
寺洞乎 英廟辛未 鑾輿幸松都 顧瞻咨嗟▢
命豎碑于杜門洞 御筆刻曰 勝國忠臣今安在 設
壇賜祭 繼下杜門洞後孫錄用之敎 自是以後
正廟癸卯 曺林孟三賢 以七十二人中 腏享賜額
表節祠 純祖辛未 朴門有成思齋 以七十二人中 追
享 癸未閔農隱金樹隱 以七十二人中追享 而其時
太學生呈開城留相曰 若復有姓名之次次聞知者 則
雖七十二人 盡數躋享 其誰曰 不可乎 開城留守狀
啓曰 因其姓名發顯 隨聞隨腏 禮曹回啓曰 次第
追享 不拘顯晦之差有先後 推此觀之 則忠齋先生
追享於表節祠 亦非難事 特因子孫 不爲運動 故
也 未知宗中僉座下 以爲何如耶 昔在鄕賢祠
追享發論時 他人各自戴出其祖上 攘臂運動
而吾宗 則醉睡齁齁 及其他人蒙允成事之後
吾宗忽然 欲挈巫後之長鼓 事遂無成 反
致侮辱 吾宗做事 每或如是而已 此雖往▢▢
事 然至今思之 不覺扼腕憤惋也 吾宗於歲▢
之時 不可謂不豊 此可謂口體之孝 不可謂養志
立揚以顯之孝也 朝鮮世祿家之舊習 自己祖上▢
分寸之長 所可譽者 則引而伸之 至于千百尺之▢▢
褒揚極矣 而吾宗 則祖先有偉大志節 而▢▢
不能闡揚 遂至泯沒 其爲子孫之不肖 果何如哉
若使宗中 有才幹該事者 靑年數人 使之周
旋用力 以忠齋先生躋享於表節祠 其爲祖先之
光彩 子孫之榮幸 當何如耶 願僉座下 爛議
之計圖之 宗中事業 以財政所入預算 則有一
千數三百圓可入者 又有三四百圓可入者 而此躋享
運動事 以百餘圓經費 則可以做事也 未知▢
宗中僉議以爲如何 躋享運動 次第節目
今姑不能一一盡告 海諒施圖之 千萬千萬
甲寅十一月三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