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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문중의 어르신 회석공(晦石公)이 1970년 9월 27일 장지(葬地)로 가기 하루 전날인 9월 26일 회석공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祭文)이다. 글의 앞부분에서는 고인이 세상을 떠난 날을 명시하고 고인을 기리기 위해 문인들이 함께 제문을 올리게 된 배경을 적었다. 봉황의 깃털처럼 보배로운 회석공의 가문은 본디 예천(醴泉)에 거주하였다가 선조의 뜻을 따라 강릉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이후 옥수(玉樹)같이 훌륭한 자손들이 이어졌으며 과거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이후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 풍호(楓湖)2)에 은거하여 지냈으나 뛰어난 자손들은 턱밑의 수염을 뽑듯이 쉬이 무과에 급제하여 가문의 전통을 계속 이어갔음을 적고는 손바닥이 뒤집히듯 변하는 세도를 근심스럽다 적고, 회석공의 집안이 어려워졌으나 후학을 가르쳐 인재를 길렀음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을 만났고 아우가 죽었으며, 아내의 죽음을 맞이했음을 적었다. 다행히도 노년에는 식복이 있어 남은 한이 없었으니 건강하게 장수하여 나이와 덕망을 모두 갖추었으며, 자손이 잘 되어 성공하였으니 도연명(陶淵明)이 술을 즐겨 마시던 모습처럼, 호리병 속의 별천지에서 사는 신선처럼 지내며 자식의 혼사를 이루었음을 적고, 1968년에 시동(詩洞)에 집을 짓고는 사람 많은 시장에 은거하였다. 갑자기 병이 들어 한달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몹시 애통함을 말하고는 남은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적었다. 글의 말미에는 회석공의 손자들이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기를 희망하며 제문을 마쳤다. 제문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생애를 회고하는 글로, 고인의 인품과 업적을 기리며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한다.
제문의 주인공인 회석공(晦石公)이 누군지는 자세하지 않다. 원문의 ‘호풍(湖楓)’은 강릉에 있는 5개의 호수 중 하나인 풍호(楓湖)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던 호수로 현재는 메워져 골프장이 생겼다. 풍호는 호수 주위에 단풍나무가 많이 우거져 생긴 이름이며, ‘앞개’ 또는 ‘남호’라고도 한다. 호수에 연꽃이 많이 피는데, 까마귀가 뿌리 없는 연꽃 씨를 까먹고 이곳에 흘리면 마을에 인재가 난다고 한다. 신라 때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 등의 화랑들이 이곳에 와서 뱃놀이를 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시도 읊었다고 한다. 호수 주위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원문의 ‘황원(黃猿)’은 간지인 무신(戊申)으로 1968년을 말한다. 1968년 회석공이 새로 집을 지은 시동(詩洞)은 원래 절골(寺洞)이라 하였으나, 인조(1639년) 때 사마시에 합격했던 완하당(玩荷堂) 박진해(朴震楷)가 바꾼 이름이다. 박진해는 이웃 마을 안인리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이사를 하였는데, 마을에 글 읽는 선비들이 많아 ‘절골’이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서 절 ‘사(寺)’ 앞에 말씀 ‘언(言)’자를 적어 시동으로 바꾸었다. 이후 이 마을을 시동이라 하였다. 현재 상시동리와 하시동리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