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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해제
1953년(계사) 10월 25일에 진천군(鎭川郡)에 사는 족종(族從) 김진봉(金鎭鳳)이 강릉(江陵) 강동면(江東面)에 사는 김병시(金炳時)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주요 내용은 김진봉이 김병시에게 강릉과 진천의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은공파(樹隱公派) 일족이 족보에서 빠질 수 없는 상황을 전하고, 족보에 들어갈 강릉 소재 일족의 명단(名單)을 수합하여 보내달라는 뜻을 적은 것이다. 1948년, 1950년 남원 종중에서 수은(樹隱) 김충한(金冲漢) 선조의 단하(壇下)의 병사(丙舍) 중건 및 족보 문제로 통문이 왔고, 당시 강릉과 진천은 시국 상황 때문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는데, 수은 선조의 단하병사 중건이 완결되었고, 이번 족보를 펴는 일에 강릉과 진천이 빠지면 안 된다는 연락을 받고서 이 뜻을 전달한 것이다. 보소(譜所)에서 강릉과 진천이 빠지게 되면 그간의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족보를 만들 수 없다며 명단 비용이나 기타 부담금 등을 따지지 말고 종중의 뜻에 따라 주길 당부했는데, 특히 일족이 각지로 흩어져 행방을 모르는 자가 많은 것은 모두가 비슷한 사정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당시의 혼란한 시국 상황을 알 수 있다. 한국 전쟁 이후의 물자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족보를 제작하고 위선(爲先) 사업에 힘쓰고 있는 당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원문
江原道江陵郡 江東面上詩洞 金炳時貴下
忠北鎭川郡萬升面廣惠院里 金鎭鳳 (敬)
癸巳十一月五日來
十九日答
分手積年 尙未一次探安 豈謂吾宗親睦情誨 都是此漢沒情之致也 幸須不棄而或勿置我於遐邇之地耶 甚悚且愧 伏惟寒事稍劇 貴體上連護萬重 閤內均吉 都大諸節泰平否 仰溯憧憧不已 族從姑依劣狀 而諸族別無他故 私幸何喩 就悚過去戊子庚寅兩年間 自南原宗中樹隱先子坍下丙舍重建及修譜事로 兩次通文有來中 客年臘月分 派員來到時에 江陵과 協議決定之意로 推後致送後 春間에 奉見江陵回書하고 時局關係로 江鎭은 無展眉之暇 不得已漏闕之意通知矣 且起事後 麗水叛亂事件及六二五以後 兵戈中 必是不得成果로 坐以思之라가 今番坍享參祀에 與三從鎭德三從孫根哲 同伴目睹 則累年患亂中에 繼續邁進하여 丙舍瓦家上下棟 四十餘間 及山直一棟五間前退을 完全重建 且樹隱先子神道碑設柱計劃에 碑石은 準備 而姑未刻字立建 且譜事修了後 貞肅公坍享設立基地已定 位土封承丙舍維持方針 杜谷書院復興 如此重大事業을 經營中이며 方今譜事도 申李兩派收單 幾爲畢至 而宗派收單이 未備 故現下物價 去去騰高함애 ᄯᅡ라 損害도 莫甚하고 修譜上支障 莫大樣矣 享祀卽後에 江鎭兩處에 派員을 起送키로 二人을 選定하고이넌중이오나 吾儕此行이 享祀爲主오 譜事不在念頭이여섯시나 實地을 當見한바에 湖南支派諸宗의 物心兩力 傾注을 感謝한디버덤 爲先熱意에 感服之心日萌動아니할슈읍사 返面에 一是子孫中宗派의 名目으로 支派子孫에 對하여 羞愧之心도 不無하엿섯습니다 況且譜所諸宗講論이 江鎭內漏闕이면 譜不成編不啻라 前後經營事가 歸於水泡이고 若失此機 則吾金合族之日 難於後日인즉 斷乎不失此機로 確固이고 此江鎭은 前例에 依하여 單錢 其他負擔金도 不計하고 應從하여달나넌 意圖이며 現下時局上 子孫中 分散各處 不知行方者 多矣나 然如此事情은 全國擧皆一致也 拘礙細情하여 不可缺大義 疑闕隨知넌 吾族全體一般矣니 細情은 不顧 速爲修單送之하여주되 人員往來가 不能이면 單子만 付送하여도 無誤成編하곗다넌 結論으로 懇切要求하오니 吾宗派 如何理由로 終末拒絶할 道理넌 圖無함이아니옵니다 그리ᄒᆡ서 百以思之한 結果 派員이 來往이면 彼此費用도 不少하고 大小의 弊도 不無ᄒᆞ곗기에 江陵連絡을 吾儕가 擔當還程하엿슴니다 細細粹言은 不可盡述이읍고 擧略記呈하오니 此書到覽后 速爲修單送之 千萬幸甚 若此書에도 疑惑이 有하시다면 一次進拜叙告爲計矣 深諒後 可否을 回示切仰耳 餘略此不備禮
癸巳十月二十五日 族從鎭鳳再拜
追告 南原서 年來派員 起送此處時에 派員一人起送하여 東海船路로 江陵尋訪키로 하엿넌ᄃᆡ 派員이 東萊船頭에 到着하자 如何한 事情으로 ᄯᆡ마참 交通이 杜絶되여 返還以後에 書字로 傳達코자하되 江陵諸族中 住所及受取人誰某을 未詳 故通信못하엿다가 今番에 書信傳達켸 될디심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