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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B003_01_B00021_001
- ㆍ입수처
- 김회준
- ㆍ자료유형
- 고전적
- ㆍ유형분류
- 집부-척독류(尺讀類)
- ㆍ주제분류
- ㆍ서명
- 초첩 / 草帖
- ㆍ표제
- /
- ㆍ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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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권수제
- /
- ㆍ판심제
- /
- ㆍ저자
- 안처순(安處順, 1492~1534)
- ㆍ간행정보
- 간사지: 간사자: 간사년: 서기년: 왕력: 추정시기:
- ㆍ형태정보
- 판종: 필사본 권수: 책수: 질: 전: 장_매: 절_면: 책차: 권차: 점수: 1 크기: 29.3 × 19 접은크기: × 장정: 계선: 판구: 어미: 광곽: 반곽크기: × 단수: 행자수: 주쌍행: 서명(署名): 주표기:
- ㆍ일반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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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사항:서:발:정의: 주기사항:
- ㆍ소장본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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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관련기록:인장종수: 2인문판독: 月城世家之藏 인장크기: *인문판독: 金炳時 인장크기: *장정:
- ㆍ요약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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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내용:자료특성:
- ㆍ언어주기
- ㆍ기타사항
- 甲寅
- ㆍ총서사항
- ㆍ현소장처
- 율곡연구원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이 간찰첩은 중종(中宗) 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지방 수령직을 자원하여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간 기재(幾齋) 안처순(安處順; 1492-1534)이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당시의 제현(諸賢)들로부터 받은 서간들을 장첩한 서찰첩인 『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을 후세에 다시 전사(轉寫)하여 만든 것이다. 그 표지에는 『초첩(草帖)』이라 제명(題名)하였는데, 선장(線裝) 1책의 필사본으로, 전후의 표지 외에 총 42면(사진 컷 수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초첩』은 곧 『기묘제현수첩』에 실려 있는 기묘명현들의 간찰 38건 전체를 어느 한 사람이 초서(草書)로 직접 전사하여 서첩으로 엮은 간찰첩이다. ‘한 사람’이라 함은 그 필적이 똑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사기(筆寫記)나 서문·발문 등이 없으므로, 그 전사자가 누구인지, 전사 시기가 언제인지, 그리고 전사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두 미상이다.
이 『초첩』의 소장자는 강릉의 월성김씨(月城金氏) 김병시(金炳時)로 보인다. 이는 이 『초첩』의 첫째 장(1b 우측하단)과 마지막 장(41a 좌측말단)에 각각 찍힌 소장인(所藏印)과 소장자인(所藏者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인문(印文)은 각각 ‘月城世家之藏(월성세가지장)’과 ‘金炳時(김병시)’인데, ‘時’는 ‘旹’로 썼다. 소장인은 정사각형의 방인(方印)이고 소장자인은 타원형의 둥근 도장이다. ‘김병시’가 어떤 인물인지는 미상이나, 타원형의 둥근 도장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리라 짐작된다.
이 『초첩』에는 총 13인의 간찰 38건이 실려 있는데, 그 편차 순서는 『기묘제현수첩』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간찰의 발신인 별 간찰 건수는 다음과 같다. ―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별첨 ‘명세표’ 참조.
⚪정응 2건 ⚪기준 2건 ⚪박상 4건 ⚪장옥·조광조 1건
⚪김정 5건 ⚪최산두 10건 ⚪이연경 3건 ⚪조광조 1건
⚪성수종 1건 ⚪김구 4건 ⚪한충 2건 ⚪남주 1건
⚪유용근 2건
『기묘제현수첩』-이하 『수첩』이라 약칭한다-에는 권수에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서문(1601년)이, 권말에 조성교(趙性敎; 1818-1876)의 발문(1875년)이 각 실려 있으나, 이 『초첩』에는 이들 서발문(序跋文)이 없다.
『초첩』에서 쓴 서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동일한 모양의 초서체이다. 이는 『수첩』에 실린 여러 서찰들이 발신인에 따라 각각 상이한 필체를 보여주는 것과 다른 점이다. 따라서 이 『초첩』에서는 조선전기의 4대 명필로 손꼽힌 자암(自庵) 김구(金絿)의 서체나 기타 명현들의 서체 등은 감상할 수가 없다.
『초첩』은 글자의 포치(布置)에서 『수첩』의 판식 형태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표기법인 대두법(擡頭法)·공격법(空格法) 등을 지키기는 하였으되 본래의 형태와 똑같이 구현하지는 않았다. 물론 1항(行)마다의 글자 수도 상이하다.
안처순의 유저인 『사재선생실기(思齋先生實紀)』 권5에도 또한 기묘제현들의 서찰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 실린 것은 총 13인의 간찰 41건으로, 『수첩』·『초첩』보다 3건이 더 많다. 거기에 실린 간찰의 편차 순서는 『수첩』·『초첩』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 세 간찰첩들 간에는 글자의 출입도 간혹 볼 수 있다.
『수첩』과 『초첩』 등에 실린 제현들의 간찰은 『충암집』·『자암집』 등과 같은 기묘제현들의 문집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 『초첩』에 실린 간찰의 수신인은 모두 안처순이다. 이들 간찰에는 수신인이 표기된 경우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수신인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초 이 간찰들을 받아서 소장한 인물이 바로 안처순이었으므로 그 수신인은 처음부터 안처순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안처순은 고려 말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자가 순지(順之)이고 호가 기재(幾齋) 혹은 사재당(思齋堂)이다.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한 뒤 홍문관 박사에 이르렀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기묘사화의 발발 전에 구례 현감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기묘사화 때 이행(李荇)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했다. 그 뒤 봉상시 판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43세의 나이로 병졸하였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초첩』의 간찰 발신인에 대해서는 이 책 권두에서 13인 중 11인을 본관·자호·경력 위주로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빠진 사람은 박상(朴祥)과 남주(南趎) 2인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위시한 기묘명현(己卯名賢) 또는 기묘제현(己卯諸賢)들의 이력 등에 대해서는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사재집(思齋集)』에 실린 「기묘당적(己卯黨籍)」 등 「기묘당적(己卯黨籍)」 등 : 기묘제현들의 행적을 정리한 책으로는 김정국이 94인의 제현들의 이력을 간략히 기록한 「기묘당적」-『사재집』 권4 소재- 외에, 안로(安璐)의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일명 『기묘당적보(己卯黨籍補)』·『기묘보록(己卯補錄』-, 김육(金堉)의 『기묘록(己卯錄)』-일명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 등이 있다. 안로는 안당(安瑭)의 손자이자 안처겸(安處謙)의 아들로서 「기묘당적」을 보완하여 「기묘록보유」를 지음으로써 129인의 제현들을 실었고, 김육은 김식(金湜)의 현손으로서 「기묘당적」과 『기묘록보유』를 바탕삼아 다시 『기묘록』을 지어서 218인의 제현들을 실었다.
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한국학중연연구원에서 발간한 『기묘제현수필(己卯諸賢手筆)·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帖)-韓國簡札資料選集 10: 南原 順興安氏篇-』에서는 『수첩』상의 ‘13인의 간찰 38건’과 『사재선생실기』상의 ‘13인의 간찰 41건’을 각 영인하여 실었고, ‘13인의 간찰 41건에 대한 번역문’도 아울러 실었다. 따라서 이 『초첩』에 실린 간찰의 본문 내용까지도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간찰자료선집(韓國簡札資料選集) 10』의 번역문을 참조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해제에서는 간찰 38건 본문의 내용 소개는 생략하기로 한다. 『기묘제현수첩』은 『기묘제현수필』과 함께 각각 보물 1198호 및 1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문헌은 기묘사화를 전후한 시기 제현들의 정신세계, 교유관계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국 상황, 기묘사화 관련 일화, 일상의 생활상 등을 보여준다. 특히 한준겸(韓浚謙) 한준겸(韓浚謙) : 1557-1627.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가 익지(益之)이고 호가 유천(柳川)이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1586년(선조 19)의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관찰사·판서·오도도원수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의 장인으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수첩』의 다음 발문 문장은 당해 간찰첩의 성격과 가치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신축년(辛丑年,1601)에 내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쪽 지역으로 나갔다가 (안처순)공의 서손(庶孫) 안응국(安應國) 씨를 통해 처음으로 그 필첩을 보게 되었는데, 정암(靜庵) 선생 이하 명경 현사(名卿賢士)들의 필적이 모두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삼가 읽은 다음 돌려주었는데, 마치 커다란 보옥(寶玉)을 얻은 느낌이었으므로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 한 개의 필첩으로 만든 다음 사우(士友)들에게 보여주었다. ……(중략)…… 아, 황급한 순간의 서찰이나 평상시에 수답(酬答)한 시문 등에서 어찌 제공(諸公)의 온축(蘊蓄)한 바를 충분히 엿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들의 임금을 사랑하고 국사를 걱정하던 정성, 악인을 물리치고 선인을 격려하던 의론, 도를 구하고 학문에 정진하던 정성, 명산과 대천을 찾아 노닐던 감흥 등, 무릇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문묵(文墨)으로 표현된 문장은 반 마디 말, 한 조각 글자라 하더라도 모두 정도(正道)에 들어맞는 것이었으니, 제공(諸公)의 출처(出處)·진퇴(進退)와 언론(言論)·풍지(風旨) 등을 한 눈에 분명히 파악해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 글을 읽고 그 사람을 상상해 본다면 또한 이 필첩은 충분히 후학들에게 귀감(龜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저들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벌레 갉아먹은 글씨를 가지고 화단(禍端)을 삼아 선류(善類)들을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궁벽한 지역으로 내쫓음으로써 목숨을 조석 간에도 보장할 수 없도록 한 형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제공들은 기운이 저상(沮喪)되지도 않고 기색이 변하지도 않은 채 느긋하고 화평한 태도로 원근을 가리지 않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심정을 토로하면서 조용히 천명(天命)을 즐기는 뜻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절도(絶島)에 구금(拘禁)당하고 중죄(重罪)에 저촉(抵觸)된 경우라 할지라도 힘껏 글을 쓰고 경계의 말을 써서 서로 현인(賢人)의 경지에 이를 것을 권면(勸勉)하였다. 그렇게 힘쓰는 가운데 수신(修身)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리면서 ‘빨리 죽고 오래 사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을 깊이 음미하였으니, 이는 ‘평소 환난(患難)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죽음과 삶을 동일시한 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이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제공의 올바른 학문과 확고한 몸가짐은 백세(百歲)가 지난 뒤에도 또한 상상해볼 수 있다 하겠다. 『己卯諸賢手筆·己卯諸賢手帖』 (韓國簡札資料選集 10: 南原 順興安氏篇),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182-183쪽.
또 한준겸의 이 발문에 의하면 각 간찰의 말미에 붙인, 간찰의 작자[발신인]를 소개한 현주(懸註)는 한준겸 자신이 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현주는 『초첩』에도 그대로 전사되어 있다. 기묘제현의 친필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그러한 현상은 시대나 당색을 초월하였다. 따라서 『수첩』은 한준겸이 서울의 사우들에게 소개한 뒤로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모사본(模寫本)·모각본(模刻本)이 유행하였다. 이는 기묘제현에 대한 시공을 뛰어넘는 존숭의 결과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창강 조속(趙涑) 어르신께서 임모(臨摹)한 기묘제현첩에 대한 발문[滄江趙丈臨己卯諸賢帖跋]」에서) 기묘제현들의 필첩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글이 뛰어나고, 글씨가 뛰어나고, 사람이 뛰어나고, 오래되어 희귀하다.’라고 요약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하겠다.
이로써도 이 간찰첩의 높은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거니와, 이 『초첩』도 또한 당시의 그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타고 제작된 결과물이 아닐까 짐작된다. 『초첩』 말미에 실린 두 편의 한시는 별첨 ‘명세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작품인데, 그것은 이 『초첩』의 전사자가 이 『초첩』의 장첩 시 우연히 첨부하였거나 아니면 공지(空紙)에 그냥 써넣어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 한시는 앞의 간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초첩』에 수록된 간찰 38건 및 한시 2수의 내역을 요약·정리하여 제시하면 대개 별첨 「율곡연구원 간찰 1 『초첩』의 내용 명세표」와 같다.
첨부 : 「율곡연구원 간찰 1 『초첩(草帖)』의 내용 명세표」 1부.
- · ⚪金淨, 『沖庵集』. ⚪金絿, 『自菴集』. ⚪金正國, 『思齋集』. ⚪韓浚謙, 『柳川遺稿』. ⚪宋時烈, 『宋子大全』. ⚪李白, 『李太白文集』 (문연각 사고전서 1066), 대만 상무인서관, 1985. ⚪『己卯諸賢手筆·己卯諸賢手帖』 (韓國簡札資料選集 10: 南原 順興安氏篇),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김덕수, 「『기묘제현수필』과 『기묘제현수첩』의 제작과 확산」, 『정신문화연구』(통권 14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