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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80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52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52년 8월 20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壬申 八月 卄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19.2 × 26.4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임신년(1752) 8월 20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임신년(1752) 8월 20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우측에 별도의 피봉이 함께 배접되어 있는데 수신자 정보로 “安洞寓所卽傳”, 발급자 정보로 “沙村行中平書”가 적혀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수신자는 ‘안동’의 우소에 있는 발급자의 아들이고, 발급자는 당시 ‘사촌’이라는 곳으로 출타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배면에는 아들에게 부친다는 의미의 “寄兒”와 그 하단에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펜글씨로 “正郎公”이 적혀 있는데, 간첩에 포함된 여타 간찰을 통해 정랑공은 신야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본 간첩의 여타 간찰을 통해 둘째 아들 신경악이 1751년 경에는 이미 사망한 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신자는 신경한으로 볼 수 있다.
길을 나설 적에 만나지 못해 서운하다고 하면서, 오늘의 안부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자신은 동틀 무렵에 출발하여 한낮에 탈 없이 도착하여 마음이 매우 한적하지만, 집의 용마루 기울기와 서까래의 장단이 도배지와 맞지 않고 토역(土役)도 매우 해괴하게 작업해 놓았으니 우습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농가[田家]라면 다 이러한 것이기에 문제될 것 없다고 했다. 새벽에 네 어미가 전하기에 창성 도위(昌城都尉)의 혼례가 안동(安洞) 우사(寓舍)로 정하여 행한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다면 오늘 내일 상간에 아마 쫓겨날 근심이 있었을 터인데 나는 마침 나왔기에 상대가 장차 홀로 고생할 것이니 걱정된다고 했다. 말을 돌려보내는 인편을 통해 대략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추록은 두 건이다. 첫째는, 매우 바빠서 아내한테 보내는 언서(諺書)를 쓰지 못했으니 네 어미에게 그리 전하라고 하였다. 둘째는, 조 파총(曺把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발급자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근황들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安洞寓所卽傳 沙村行中平書 ■■■(八念午) 緘 【壬申八月卄】
寄兒 【正郎公】
行時不得相見 可悵 今日安否 如何 吾 開東發行 日午無事來到 意甚閑適 而但欹傾之棟 長短之椽 實不合塗紙 且其土役 尤爲駭恠 可笑 然此是田家本色 亦何傷之有哉 曉聞汝慈所傳 則昌城都尉婚禮 定行於安洞寓舍云 果然則今明間 似有見逐之患 吾適出來 汝將獨勞 憂念不已 因歸馬 畧付安信 憊撓不多及 壬申 八月 卄日 父
忙甚 諺書不克爲之 可告汝慈也
曺把摠未及來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