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73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51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51년 12월 27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辛 臘 27일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17 × 20.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신○년(신미 1751 추정) 12월 27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신○년(신미 1751 추정) 12월 27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우측에 별도의 피봉이 함께 배접되어 있는데 수신자 정보로 “大寺洞本宅卽傳”, 발급자 정보로 “龍衙平書”가 적혀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수신자는 ‘대사동’ 본가에 있는 발급자의 아들이고, 발급자는 당시 용인현 관아에 부임해 있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1753(영조 29) 7월 23일(병자)> 기사를 참조하면 그는 ‘신미년’에 용인현령에 재직 중이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발급연도 ‘辛’은 신미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원폭의 우측 하단에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펜글씨로 “正郎公”을 적어두었는데, 간첩에 포함된 여타 간찰을 통해 정랑공은 신야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본 간첩의 여타 간찰을 통해 둘째 아들 신경악이 1751년 경에는 이미 사망한 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신자는 신경한으로 볼 수 있다.
하인 복(卜)이는 아마도 먼저 들어갔을 것이라고 하면서, 야간에 안부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자신은 이전대로 지낸다고 하였다. 고을 아전이 사장(辭狀)을 가지고 올라갔고 또 이렇게 편지를 부치니 나머지 사연은 앞서 보낸 편지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발급자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근황들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大寺洞本宅卽傳 龍衙平書 卄七日 [着圖書] 緘 【辛臘二十七日】
寄兒 卜奴想先此入去矣 夜間安否如何 馳念馳念 此中如昨 官吏賫辭狀上去 又此寄音 餘在前書 玆不復贅 辛 臘 卄七日 父 【正郎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