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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70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48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 父추정: 신야의 아들
- ㆍ발급시기
-
1748년 8월 20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戊辰 八月 念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3.8 × 4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무진년(1748) 8월 20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무진년(1748) 8월 20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스스로를 ‘父’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피봉은 별도로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이 간찰이 전래된 형태 등으로 판단하면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 발급 간찰로 추정된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전후로 보낸 편지는 모두 다 잘 받아 보았다고 하고, 자신은 엊그제 저녁에 자신이 있는 곳으로 처음 도착하였으니 한천에서 하루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열흘이 넘게 다녔지만 무탈하다고 했다. 자신이 도착한 날 하인 복(卜)이도 이르러서 그를 통해 편지를 받아 편안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다만 상대 어미가 병환이 생겼다고 하니 일간에 조금 어떠하냐고 물었다. 18일 기제사는 무사히 치렀다고 하였으니 다행이나 자신이 밖에 있어 참석하지 못해 서운하다고 했다. 갈산(葛山)의 상보(喪報)를 듣고 슬픈 감정을 언급하고, 호동(壺洞)의 환조(換租)에 관한 건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장례 날짜가 열흘 밖에 남지 않았으니 즉시 호동에 회보하여 소용할 분량을 헤아려 말을 보내 운반해 가게 하라고 했다. 자신이 돌아갈 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입성한 뒤 바로 다시 의송(議送)을 올리고자 하지만, 방백(方伯)의 순행 날짜와 겹칠까 걱정된다고 하면서, 방백이 만일 이미 순행을 출발했다면 좋겠지만 출발하지 않았다면 일이 지연될 수 있으니 고민된다고 했다. 장동(長洞) 김매(金妹)는 노심하며 제사를 차른 뒤끝에 병은 나지 않았는지 묻고, 김매와 중빈(仲賓)의 편지 모두 받아 보았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돌아갈 것이고 지금은 매우 바빠 이들에게 모두 답장을 하지 못하니 상대가 보고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추록에는, 승보시(陞補試) 재초(再抄)는 아직 설행하지 않았지만 학제시(學製試) 역시 아무 소식이 없는지 물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발급자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근황들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前後諸書 皆一一見之 吾再昨夕 始到此處 蓋留寒泉一日故也 跨旬行役 身上無恙 可幸 來此之日 卜奴亦至 卽得書信 知安 可喜 第汝慈有患 日間加减 如何 是可慮也 十八忌祀 無事過行云 可幸 吾適在外 不得同參 愴念何言 葛山喪報 固料其不能復起 而古老云亡 殊可傷惻 壺洞換租事 有何所難 聞其葬日 只隔旬餘 卽爲回報於壺洞 使量其所用 送馬運去 似好耳 吾歸期姑未卜 入城後卽欲更呈議送 而恐與方伯發巡相値 方伯若已發巡 則固好矣 而若未發 則●(漸)將至延拖 可悶 長洞金妹 勞心經祀之餘 病不添加云耶 馳慮不已 金妹書仲賓書皆見之 而吾當匪久還歸 且甚忙遽 俱未作答 如見之爲傳此意 可也 只此 戊辰 八月 念日 父
陞補再抄 尙不設行 而學製亦無消息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