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69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53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兒
원문내용: 寄兒추정: 신야의 아들
- ㆍ발급시기
-
1753년 12월 17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癸 臘 十七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19.7 × 39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계○년(계유 1753) 12월 17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계○년(계유 1753) 12월 17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피봉은 별도로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맨 우측 상단과 하단에는 각각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펜글씨로 “癸酉臘月正郎公”과 “正郎公”이라고 적어두었는데, 이를 통해 발급연도 ‘癸’는 계유년으로 볼 수 있고, 간첩에 포함된 여타 간찰을 통해 정랑공은 신야임을 알 수 있다. 푸른색 계선과 매화도가 인쇄된 시전지에 작성되었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본 간첩의 여타 간찰을 통해 둘째 아들 신경악이 1751년 경에는 이미 사망한 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신자는 신경한으로 볼 수 있다.
며칠간 추위가 혹독했는데 그간 안부는 어떤지 묻고, 자신은 이전대로 편안히 지낸다고 하였다. 지난번 경진(庚辰)이가 올린 고목(告目)을 보니 ‘지난해 홍득귀(洪得龜)에게 두 차례에 걸쳐 판 논 10마지기에 해당하는 두 통의 명문(明文)은 비록 이미 받아두었지만 본문기(本文記)는 홍가에게 있었고, 상중에 있는 종수씨(從嫂氏) 집은 배탈(背頉)이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홍가가 죽었으므로 그의 과부가 필시 송사를 일으킬 것이니 장차 빼앗길 염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어제 본문기를 가만히 꺼내어 다시 사람을 보내 와 배탈에 관해 고하고 갔다고 하였고, 오늘 조 파총(曺把摠)이 마침 도성으로 들어왔기에 그에 대한 곡절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명문은 필시 상대의 책 상자 안에 보관해 두고 있을 것이니 이를 찾아내어 조군에게 그 명문을 고쳐 이를 합하여 1통으로 만들며, 본문기 가운데 배탈 연월이 있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해 두라고 당부하였다. 조군이 돌아오는 날은 자신과 맞지 않을 것 같으므로 이 편지에 꼭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발급자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근황들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
寄兒 數日寒嚴 日間安否 如何 馳念馳念 吾安遣如昨耳 向日見庚辰告目 則以爲頃年洪得龜所賣畓兩次合十斗落 二度明文 雖已捧納 而其本文記在洪哥 寡居從嫂家 未及背頉 今洪哥身死 彼寡婦必起訟 將有見失之慮云矣 昨者竊出本券 又專人來告背頉以去 今曺把摠適入城 詳知其曲折矣 其明文必藏在汝篋裏 搜出而使曺君改成其明文 合兩度爲一度 且與本券中背頉年月 無相左之弊 至可至可 曺君之回 想與我相違 此書不必爲答也 只此 癸 臘 十七 父 【正郎公】 【癸酉臘月正郎公】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