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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63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49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경한(1719, 1770~)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49년 12월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己巳 臘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5.8 × 30.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기사년(1749) 12월 모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기사년(1749) 12월 모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스스로를 ‘父’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인접한 다른 간찰에 근거할 때 두 아들 중 신경한이 수신자로 판단된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피봉은 별도로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이 간찰이 전래된 형태 등으로 판단하면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 발급 간찰로 추정된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자신이 보낸 5일자 답서는 곧바로 전달되었는지 묻고는, 일전에 또 2일 자 편지를 받았으니 위로되지만 그간 인편이 없어 답장을 하지 못해 답답했었다고 했다. 목소리가 나지 않은 증세는 요새 다시 어떤지, 독서하는 것도 한결같이 전일하고 있는지, 『어류(語類)』는 몇 권을 보았는지 등을 물었다. 대흥(大興) 종씨(從氏)는 3일간 머물면서 아이의 혼사를 치른 뒤 약현(藥峴)의 김한태(金漢泰) 집으로 갔다가 보름 이후에 왔던 길을 되돌아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했고, 빈종(賓從)의 병세는 지금은 걱정할 것이 없고 그의 처에게 옮았다는 이야기는 헛소문이었다고 했다. 다만 김산(金山)의 아내의 병은 여러 날 위급하다고 하여 염려된다고 했다. 집의(執義) 종씨는 또 집으로 달아갔는지 묻고는 지난달 18일 인편에 오래 머물게 하지 말고 속히 돌려 보내달라는 뜻으로 편지를 보내 간청했었는데, 그 뒤 거의 수십 일이 지났지만 끝내 한 글자의 답장도 받지 못했으니 혹 중간에 편지가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전에 보낸 주사는 곧바로 복용하였는지, ■■는 잘 갔는지 묻고, 전후의 편지 모두 받았다는 말이 없어 의아하다고 했다. 안동(安洞)에서 가는 인편을 통해 이 편지를 부친다고 했다. 추록에는, 상대의 처는 호동(壼洞)에 있는데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발급자와 주변의 당시 근황이나 집안을 염려하는 마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初五答書 果卽傳去否 日前又得初二書 甚慰 其間無去便 未卽答 可鬱 失音之證 近復如何 而所讀亦一向專一否 語類看得幾卷否 此中大都如昨 大興從氏留三日過婚後 還出藥峴金漢泰家 欲於望後 卽復路南歸 付賓之病 今幾無憂 其妻傳痛之說 果是虛驚云 極可幸也 第聞金山妻病 多日阽危 遙慮難狀 執義從氏又卽返第否 前月十八便 以勿久留速還之意 奉書懇請矣 其後殆過數旬 而終未承一字之答 豈或浮沈否 是未可知也 前送朱砂 果卽試服■■草封 亦善去否 前後書俱無領受之語 可恠 聞自安洞 有邸便付書事 畧此寄信 忙不多及 己巳 臘日 父
汝妻在壼洞 未及還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