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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62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49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원문내용: 答翰兒추정:
- ㆍ발급시기
-
1749년 12월 5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己巳 臘月 五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19.5 × 26.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기사년(1749) 12월 5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기사년(1749) 12월 5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우측에 별도의 피봉이 함께 배접되어 있는데 “答翰兒”가 적혀있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수신자는 신야의 아들인 신경한(申景翰, 1719~1770)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피봉의 좌측 하단에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펜글씨로 “正郎公”을 적어두었는데, 간첩에 포함된 여타 간찰을 통해 정랑공은 신야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여러 날 소식이 막혀 한창 걱정되던 차에 안동(安洞)의 인편을 통해 그믐에 보낸 편지를 받고 편안하다는 안부를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했다. 자신은 우선 이전대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빈종(賓從)의 병은 점차 나아간다고 하다가 어제 그의 처에게 다시 통증이 옮았다고 들었으니, 비록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염려된다고 했다. 대흥(大興)의 종씨(從氏)가 어제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머물면서, 밤에 폐백(幣帛)을 보내고 오늘 초례(醮禮)를 치르고자 하지만 눈이 이처럼 내리니 심란하다고 했다. 아들의 처(며느리)가 그믐날 본가로 갔고 오늘 새벽에 상제(常祭)에 참여할 것이지만, 공교롭게 이곳의 혼사 일자와 상치하여 가서 위문하지 못해 슬프다고 했다. 막남(莫南)이 떠날 때 부친 답서와 28일 안동 인편으로 부친 답서는 모두 잘 전달되었는지 묻고, 생도 구최원(具㝡遠)은 얼마 전에 막내 숙모의 상을 당했는데 누가 그를 친상을 당했다고 말했냐고 하면서 의아하다고 했다. 윤경렬(尹景烈) 군이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많은 사연은 편지를 전달할 능(陵)의 하인이 이제 출발한다고 하고 게다가 바쁜 일이 겹쳐 일일이 다 쓰지 못한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발급자와 주변의 당시 근황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答翰兒 【己巳十二月初五】 緘 【正郎公】
累日阻聞 方以爲念 卽因安洞 獲見晦日書 知安 可慰 此中姑如昨 賓從之病 漸入佳境云 而昨聞其妻又傳痛云 雖未詳其的實與否 而憂慮不可言 大興從氏 昨日率兒 來寓於吾家 夜送幣 今●將行醮 而雪下如此 心亂心亂 汝妻晦日往本家 今曉參常事 適與此中 婚日相値 未卽往慰其諸哀 可悵 莫南去時答書及卄八安洞便所付答書 皆一一傳去否 具生㝡遠 頃遭其季母喪 誰云遭巨創耶 可恠 尹君景烈書送之 千萬聞陵隸臨發 且値紛撓 不能一一 己巳 臘月 五日 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