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61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49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원문내용: 寄翰兒추정:
- ㆍ발급시기
-
1749년 11월 20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己巳 至月 卄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4 × 31.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기사년(1749) 11월 20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기사년(1749) 11월 20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우측에 별도의 피봉이 함께 배접되어 있는데 “寄翰兒 追書”가 적혀있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수신자는 신야의 아들인 신경한(申景翰, 1719~1770)이고, 앞서 같은 목적으로 발급한 간찰이 한 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간찰이 전래된 형태 등으로 판단하면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 발급 간찰로 추정된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본문에서 “네 아우의 연고로 버리고 나오기 힘들어[以汝弟之故 難於捨出]”라고 한 언급을 통해 수신자는 발급자의 두 아들 가운데 맏이 신경한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엊그제 돌아가는 인편이 막 출발한다고 듣고 답장을 써서 보냈더니 조금 전에 듣기에 그 놈이 아직까지 머물고 떠나지 않았다고 하여 이전 편치를 회수하고 다시 편지를 써서 부친다고 하면서, 자신은 이전대로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어제 엄보(嚴甫)가 ‘주사(朱砂)는 때에 구애되지 말고 한두 푼을 입 안으로 넣어 침과 함께 삼키기를 수차례 한다면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창질[癘]도 막을 수 있다’고 하므로 주사 3전(戔) 남짓을 찾아 보내니 시약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주사를 처음엔 상대가 가져갔다고 생각되어 앞선 편지에서 보내오라는 말을 썼다가 내간(內間) 측에 들으니 상대가 애초에 가져간 일이 없다고 하므로 찾아내어 나눠 보낸 것이라고 했다. 신광열(申光說)이 보낸 담배는 이제야 비로소 잘라 보냈다고 하고, 상대의 처가 어제 돌아갔다고 하는 등의 소식도 전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발급자와 주변의 당시 근황이나 자식의 병을 염려하는 마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寄翰兒 追書 【己巳至月卄日】 緘
再昨聞歸人臨發 裁答以送矣 俄聞其漢 尙今留滯 還推前書 復此追奇 此間與昨一樣 無可言者 日昨嚴甫云朱砂不拘時 將一二分 納于口中 以涎呑下日數次 則不但鎭心有功 亦能辟癘云 故朱砂三戔餘覓送 試之爲可 朱砂初意汝持去 原書有送來之語 問于內間 則汝元無持去之事云 故搜出分送矣 申光說所送草 今始折送 索于此去人爲妙 汝妻昨日還歸矣 餘不多及 己巳 至月 卄日 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