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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51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35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35년 12월 11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乙卯 臘月 十一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5.6 × 43.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35년 12월 11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을묘년(1735) 12월 11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우측에 별도의 피봉이 함께 배접되어 있고 “答翰兒”가 적혀있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수신자는 신야의 아들인 신경한(申景翰, 1719~1770)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아래에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펜글씨로 “正郎公 埜”라고 적어두어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가 발급한 간찰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지난 그믐에 호동(壺洞) 인편이 돌아온 편을 통해 편지를 받았고, 그 뒤 또 다시 소식이 막혔으니 걱정이 심해지던 차에 7일자 편지를 받아서, 오른손가락이 ‘출구(出臼)’하여 움직이는데 방해됨이 심하다고 하니, 이른바 ‘출구’라고 하는 말은 무슨 증세이냐고 물었다. 혹 종기의 일종인지, 아니면 다쳐서 통증이 생겼다는 말인지 묻고는 지금 상황은 어쩠냐고 하면서 상세히 알지 못해 답답하다고 했다. 일기에서 6일을 보니 「요전(堯典)」‧「순전(舜典)」을 읽기를 아직 다 마치지 못했다면 그 노력을 알만하다고 했다. 삼여의 때에 하는 공부는 더욱 이와 같다고 했다. 관대는 어째서 편지가 없냐고 하면서, 비단 편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편지 없는 도만 보내 온 것을 보니 날짜가 빠진 것이 많으니 이로 미루어 알만하다며 탄식함직하다고 했다. 무첨(无忝)이 상소에 관한 일로 강계(江界)로 정배되었다가 바로 좌상(左相)의 진소(陳疏)에 의해 환수하고 극지(極地)로 투비(投畀)하라는 명이 내려진데다가 유적(儒籍)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과거 응시 자격도 정지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발급자의 당시 근황 및 자식을 염려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答翰兒 [手決] 【正郎公 埜】
去晦臺洞便回 見書 其後又復阻信 憂念方深 卽得初七書 右指出臼 甚妨運用云 所謂出臼云者 未知何症耶 或是瘇類否 抑致傷而作痛否 卽今輕重 如何 未能詳知 鬱慮難狀 吾安遣 慈闈月初出往銅江 蓋李生員葬期不遠 且有忌祀故也 不得逐日承候 伏鬱伏鬱 日記見之六日 而不能了堯舜典 則其勤可知 三餘之工 又復如此 尙有何言 觀大何無書耶 非但無書 又無書圖之送示者 其闕日之多 可推而知 可歎可歎 无忝因䟽事 初配江界 旋因左相之■(陳) ■(旋)還收極投之命 而刊名儒籍■■停擧矣 餘聞便發 忙草不一 乙卯 臘月 十一日 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