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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45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34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신야의 두 아들 신경한(申景翰, 1719~1770)과 신경악(申景岳, 1725~?) 중 일인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1 × 2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갑인년(1734 추정) 12월 15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갑인년(1734 추정) 12월 15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스스로를 ‘父’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피봉은 별도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 간찰이 전래된 형태 등으로 판단하면 발급연도 ‘甲’은 갑인년, 발급자는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로 추정된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뜻밖에 일삼(日三)이의 인편을 통해 편지를 받고 편안하다는 점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글 짓고 독서하는 공부도 여전히 애쓰고 있는지 묻고, 재차 받은 편지에 모두 공부의 근만(勤慢) 여부가 어떤지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답답하다고 했다. 자신은 12일부터 새벽에 일어나 산에 올라가 연일 바람과 추위를 맞아가며 밤까지 일하다가 내려온 지가 지금까지 4일째인데도 일꾼[軍丁]이 부족하여 석재 운반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 등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계아(桂兒)의 병이 점차 낫고 있다는 점, 변전(卞錢)을 아직도 보내지 않았으니 윤문의(尹文義)가 다시 사람을 보내 독촉한다면 우선 가친(家親)이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는 것으로 답을 하는 것이 옳다는 언급, 진일(震日)이 이제 막 혼서를 보냈고 이 대간(李臺諫)이 이를 듣고 이미 들어왔지만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겠다는 언급, 김(金) 군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못했으니 이 말을 전해 달라는 말, 수정(水井)의 묘지기가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그의 편에 이 편지를 부친다는 말 등이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발급자의 당시 근황 및 자식의 학업에 대한 염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A009_01_A00046_001
참고자료
원문
意外日三便得書 知安 可喜 做讀亦如前勤苦否 再見書皆不言工夫勤慢何也 此甚可鬱 吾自十二日曉起上山 ●(終)連日受風寒 侵夜而下者 今至四日 而軍丁不足 運石極難 其間所運者 只望柱一床石 及一石 人艱辛移運於數里許 其餘則皆在山上 畢運無期 歸日杳然 客中愁悶 不可狀言 桂兒之病 漸至完合之境云 可幸 卞錢至今不送云 殊可駭也 尹文義若更送人督之 則●●●(諉之於)以姑待家親之還歸爲答 可也 震日方所送昏書 正及於渴求之際 甚幸 李臺聞已入來 何以出場 殊鬱殊鬱 金君書又未及作答 此意傳之爲好 聞水井墓奴上去 燈下艱草 只此 甲 臘 望 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