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33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34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 父추정: 신야의 두 아들 신경한(申景翰, 1719~1770)과 신경악(申景岳, 1725~?) 중 일인
- ㆍ발급시기
-
1734년 4월 21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甲寅四月卄一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8.3 × 35.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34년 신야가 고대하던 중 편지 받음과 蟾村에서 小祥 栢洞의 妹氏 시아버지 喪事 등에 대한 심경을 전함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갑인년(1734) 4월 21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스스로를 ‘父’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피봉은 별도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 간찰이 전래된 형태 등으로 판단하면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 발급 간찰로 추정된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이고 아들은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한창 상대가 그립던 중에 하인이 온 편으로 편지를 받고 상대가 다시 섬촌(蟾村)으로 들어가 형제끼리 만났다고 하니 기쁘다고 하였다. 자신은 어버이 모시며 이전대로 지내고 있고, 돌아갈 기일도 아직 정해지지 않아 답답하다고 했다. 하지만 필시 섬촌의 소상(小祥) 때는 맞춰 내려가고자 한다고 했다. 백동(栢洞) 자씨(姊氏)는 시아버지 이 무주(李茂朱) 어른의 상을 당해 이제 막 성복(成服)을 거쳤다고 하니 매우 슬프다고 했다. 상대가 지은 글을 보고 돌려준다고 했다. 본문에서 언급된 섬촌은 여주 섬락(蟾樂)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암(貞菴)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별호이기도 한데, 발급자의 부친 신석화(申錫華)와 민우수의 부친 민진후(閔鎭厚)가 처남매부지간이므로 발급자의 외사촌이 민우수가 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당시 상제에 관한 풍속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戀思方極 奴來得書 知還入蟾村 兄弟相會 可喜 吾侍事如昨 歸期尙未卜 殊可鬱也 然必欲趁蟾村小祥下往耳 栢洞姊氏 遭其尊舅李茂朱丈喪事 才經成服 慘怛何言 所作見還耳 只此 甲寅 四月 卄一日 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