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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9_01_A00032_001
- ㆍ입수처
- 평산신씨 대종중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34년 신야 간찰 / 申埜 簡札
- ㆍ발급자
-
신야(申埜, 1697~175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신경한(申景翰, 1719~1770)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34년 4월 5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甲寅四月五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28.3 × 32.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갑인년(1734) 4월 5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아들인 신경한에게 발급한 공부를 독려하는 내용의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갑인년(1734) 4월 5일에 신야(申埜, 1697~1759)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父’, 수급자는 ‘兒’로 표현하여 부친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볼 수 있다. 배접된 형태로 현존하며, 피봉은 배접된 배면에 “寄翰兒”가 적혀있는 것이 확인되므로 자봉(自封)으로 보이고, 수신자는 신야의 아들인 신경한(申景翰, 1719~1770)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발급 연월일 기재부 하단에는 후대의 기록으로 보이는 펜글씨로 “正郎公 埜”라고 적어두어 평산 신씨 문중의 신야가 발급한 간찰임을 알 수 있다. 발급자 신야는 자는 문지(文之),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석화(申錫華)이고 아들은 신경한, 신경악(申景岳, 1725~?)이 있다. 1726년(영조 2) 병오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한 뒤, 1731년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된 뒤로 장흥고직장‧종부시주부‧호조좌랑‧호조정랑‧임실현감‧사복시주부‧용인현령‧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 후 약 100년 뒤인 1858년(철종 9)에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었고, 이때 아들 신경한도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음이 확인된다.
이별한 뒤 소식을 받지 못했는데, 요즘 안부는 어떤지 묻고, 자신은 어버이 모시며 잘 돌아와 연일 편안히 지낸다고 하였다. 듣기에 우만(牛灣)으로 출접(出接)하였다고 하는데 착실히 공부하고 있는지, 지금은 시 몇 수까지 지었는지를 물은 뒤 지은 것을 다음 인편을 통해 보내보라고 하였다. 총관(驄冠, 갓), 입모(笠帽, 모자), 선자(扇子, 부채)를 보낸다고 하였다. 추록은 2건이다. 첫째는, 비록 시문(時文) 짓는 연습을 하고 있을 때라도 독서 공부를 전폐해서는 안 되니, 매일 아침식사 전에 반드시 전심으로 독서를 하고 식후에 시문 공부를 시작하되, 절대 태만하거나 방자하게 노는 습관을 버리고 공부에 매진해야만 장진(長進)할 가능성이 있으니 열심히 하라고 했다. 둘째는, 모자걸이[笠去里]도 보낸다고 하면서, 이것은 상대의 어미가 필시 꾸며서 보내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자식의 학업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과 당시 시문을 준비하는 모습, 생활 용품의 종류나 명칭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平山申氏大同譜』 卷2 南有容 『雷淵集』 卷23 「戶曹正郞申公墓碣銘」
참고자료
원문
■■■(寄翰兒)
別後未得消息 比日安否如何 馳念不可言 吾侍奉好還 連得安遣耳 聞出接牛灣 果能着實做工否 今得幾許首耶 所作因便送示也 驄冠笠帽扇子送之 可領受也 餘望努力毋怠 只此 甲寅 四月 五日 父 【正郎公埜】
雖在做時 不可專廢讀工 每日朝前 則必須專心讀書 食後開做 而做時亦絶去怠惰放肆之習 專意所業 庶可有長進之望 汝其勉之哉
笠去里亦送之 此則汝慈必當餙送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