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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8_01_A00013_001
- ㆍ입수처
- 창녕조씨 종회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박래린 외 등상 / 朴來麟 外 等狀
- ㆍ발급자
-
박래린(朴來麟, 개인)
홍규옥(洪圭玉, 개인)
심진벽(沈鎭璧, 개인)
최동진(崔東晉, 개인)
김낙봉(金洛鳳, 개인)
안봉문(安鳳文, 개인)
홍종무(洪鍾武, 개인)
원문내용: 道下面面長朴來鱗, 面內頭民 洪圭玉 沈鎭璧 崔東晉 金洛鳳 安鳳文 洪鍾武 等추정:
- ㆍ수취자
-
삼척군수(三陟郡守, 기관/단체)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 辛丑왕력:추정시기:본문: 辛丑六月 日
- ㆍ형태정보
-
점수: 1크기: 107 × 68.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 2인문판독: 三陟郡印 인장크기: *보존상태: 양호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道下面長 朴來麟 등이 金秉元의 妻 沈氏의 孝㤠 포상을 요청하는 문서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901년 박내린(朴來鱗) 등 7명이 삼척군수(三陟郡守)에게 올린 소지(所志).
1901년(광무 5) 6월에 도하면(道下面) 면장(面長) 박내린(朴來鱗) 등 7명이 삼척군수(三陟郡守)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소지는 조선시대 백성이 관(官)에 소송(訴訟)·청원(請願)·진정(陳情) 등을 위해 지방 수령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지방 수령은 소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 소지의 여백에 처분의 내용인 제음(題音)을 적어 내려 보냈다.
도하면 면장 박내린과 면내 두민(頭民) 홍규옥(洪圭玉), 심진벽(沈鎭璧), 최동진(崔東晉), 김낙봉(金洛鳳), 안봉문(安鳳文), 홍종무(洪鍾武) 등은 삼척군수에게 도하면 지흥동(知興洞)에 사는 고(故) 유학(幼學) 김병원(金秉元) 처(妻) 심씨(沈氏)의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에 대해 정려(旌閭)의 포상을 요청하였다. 소지의 내용은 심씨의 성품을 언급하고, 심씨의 시부모에 대한 효행과 남편에 대한 열행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심씨는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하며,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시고,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집안사람들이 모두 어진 덕행을 칭송하였다. 지난 을축년(1865) 봄에 심씨는 시아버지가 설리(泄痢)에 걸리자 수개월 동안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시아버지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거의 세상을 떠나려 하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기도 하였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극진히 예를 다해 장례를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곡묘(哭墓)하였다. 정묘년(1867) 봄에 심씨는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하자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돌아가신 후에 시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같이 예를 다해 상례를 치렀다. 그 후 남편도 설리(泄痢)에 걸려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경오년(1870) 봄에 세상을 떠났다. 심씨는 남편의 삼년상을 마친 후에 남편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박내린 등 7명은 이러한 심씨의 행실이 하늘이 내린 효행과 열행이니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국왕에게 아뢰어 정려의 포상을 내려줄 것을 삼척군수에게 요청하였다. 6월 4일에 삼척군수는 ‘뛰어나고 남다른 행실을 이미 들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결국 마땅히 부(府)에 보고가 있어야 하니 사람(士林)에서 공의(公議)로 충분히 의논하여 춘천부(春川府)로 가서 정소(呈訴)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삼척부사는 소지의 좌측 여백에 ‘관(官)’자를 초서(草書)로 쓰고 그 아래에 착압(着押)을 하였으며, 처분의 내용에 삼척군인(三陟郡印) 3과(顆)를 답인(踏印)하였다.
1901년 박내린(朴來鱗) 등 소지(所志)를 통해 심씨의 효행과 열행에 대한 정려의 포상을 요청하기 위해 도하면에서 삼척군수에게 소지를 올리는 과정과 이에 대해 삼척군수가 내린 처분을 확인할 수 있다. 1901년 박내린 등 소지와 함께 김병원 처 심씨의 효행과 열행에 대해 삼척부사와 강원도관찰사에게 포상을 요청하는 소지와 상서는 총 4점이 전해지고 있다. (자료 ID : A008_01_A00014_001, A008_01_A00015_001, A008_01_A00016_001)
원문
道下面面長朴來鱗
右謹言精由事 本面智興洞 故學生金秉元妻沈氏 素性幽閒 處事必敬 事舅姑以誠 遇諸族以睦 一門莫不
稱其淑德至行 其舅姑甚愛之 其夫又敬重 有如崔門新婦之孝敬 往在乙丑春 其侍父以泄痢 委席數月
侍湯供甘 晝宵竭誠 漸至於捐世之境 裂指注口 俄而回春 竟至三日 以終天年 沈氏臨喪 氣塞而後甦者 四五次矣 隣
里幷救 幸而得全 以禮葬之 朝夕哭墓 四時節服 必新製而焚於墓前 丁卯春 其姑僅至於終喪 亦以天年 病甚危𤭏 嘗
糞侍疾 未得救甦 執喪踰禮 朔望上墓 擗踊哭泣 皆如侍父喪 如此孝行 世所稀有 而其夫亦以泄痢 累月不起 恐
傷糞門 以舌舐之 親爲供藥 築壇願代 而幸得復甦 庚午春 奄終天年 居喪諸禮 皆己之所有也 三年闋襄後 顧謂
子侄曰 吾至今救命者 以所天終喪故也 今則雖云在世 焉有用之 我死之後 願埋所天之側 願從所天 以終在世 未展之誠 於重
泉之下 語絶而終 此實天賦之孝烈也 孰不欽仰而歎美哉 如此根天之行 不可堙沒 故玆敢仰訴爲去乎 洞燭敎是後
轉報巡營 俾達天聰 以爲旌褒之地 千萬望良爲只爲
行下向敎是事
城主處分
辛丑六月 日 面內頭民 洪圭玉 沈鎭璧 崔東晉 金洛鳳 安鳳文 洪鍾武 等
(題音)
卓異之行 旣所
聞矣 豈不欽歎
哉 終當有報
府是在果 自
士林 爛商公議
往呈于春川
府向事
初四日
官[着押]
[三陟郡印] 3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