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593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시문류-시(詩)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미상년 최병주, 이재 시문 / 怡齋, 崔秉柱 詩文
- ㆍ발급자
-
최병주(崔秉柱, ,)
이재(怡齋)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6.8 × 60.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미상년 최병주와 이재의 청풍당에서 지은 두 편의 시문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해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문 / 국역
[1]
芝宇相逢問幾何
中間離索玉音遐
栗翁生長知靈界
竹主平安送歲華
飮敍閑情盃進酒
追惟往事海無涯
長城以北談兵者
決勝神謀水壅沙
石南 新里 崔秉柱
[2]
鼎舒勝似百朋何
却道山陰興不遐
隣隙轉加修楚越
時人徒自混夷華
君今捨舊開三逕
我飮從前守一涯
寄語■朋如雁翼
秋來還集鏡湖沙
怡齋
[1]
청풍당1)에서 밤에 ‘중화 강물을 막는 일이 얼마나 요원한가’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대2)와 서로 만난 지 그 얼마나 되었는가
헤어진 그 사이에 그대 소식조차 멀어졌지
율옹 나고 자라신 곳3) 신령함을 알겠기에
대밭 주인4) 평안하게 남은 세월 지내는구나
한가로이 술자리 펴 서로 술잔 나누면서
지난 시절 추억하니 바다처럼 끝이 없다네
장성의 북쪽에서 병법 논하는 사람들이
모래 옹벽 터트리는 신묘한 계책5) 말한다오
석남 신리 최병주
1) 청풍당(淸風堂) : 1744년(영조 50) 권계학(權啓學, 1716~?)이 지은 집이다. 권계학이 중국으로 사신 갔을 때에 산동성 백이숙제의 사당 앞뜰 비석에 새겨진 ‘백세청풍(百世淸風)’을 탁본하여 돌아온 후 강릉 북평촌(현재의 오죽헌 일대)에 집을 지으면서 청풍이라 하였다.
2) 그대 : 원문의 ‘지우(芝宇)’는 글에서 상대방의 얼굴에 대한 경칭으로 쓰이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의 은사(隱士) 원덕수(元德秀)의 자가 자지(紫芝)였는데, 재상 방관(房琯)이 항상 원덕수를 보면 찬탄하여 말하기를, “자지의 미우를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를 좇는 마음을 다 사라지게 만든다.[紫芝眉宇 使人名利之心都盡]”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권194 「원덕수열전(元德秀列傳)」에 보인다.
3) 율옹(栗翁)이 나고 자라신 곳 : 율옹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말한다. 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풍당이 오죽헌 일대에 있으므로 율곡을 말한 것이다.
4) 대밭 주인 : 오죽헌에 있는 대밭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서는 청풍당의 주인을 말한다.
5) 모래 옹벽……계책 : 원문의 ‘수옹사(水壅沙)’는 모래를 넣은 주머니로 둑을 쌓아 물을 막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한신(韓信)이 용저(龍且)와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을 때, 밤중에 만여 개의 자루에다 모래를 담아 유수의 상류를 막은 뒤에 강 복판으로 적군을 유인하여 그 둑을 일시에 터뜨려 승리하였던 고사로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後列傳)」에 보인다. 또한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 양제의 군대를 살수에서 몰살시켰을 때 사용했던 전술이기도 하다.
[2]
서정1)이 백붕2)보다 나은 것은 어째서인가
도리어 산음의 흥취3) 멀지 않다 말하는구나
이웃과는 갈수록 더 초월4)처럼 지내는데
사람들은 되려 절로 오랑캐와 뒤섞이누나
그대 지금 옛집 버리고 세 오솔길5) 열고
나는 술 마시며 예전처럼 하늘 끝 지키네
기러기 날개에 ■ 벗에게 소식 전하노니
가을 오면 다시 경포 모래밭에 모입시다
이재가 쓰다
鼎舒勝似百朋何
却道山陰興不遐
隣隙轉加修楚越
時人徒自混夷華
君今捨舊開三逕
我飮從前守一涯
寄語■朋如雁翼
秋來還集鏡湖沙
怡齋
1) 서정(舒鼎) : 원문의 ‘정서(鼎舒)’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노 정공 상(魯定公上)」에서 말한 위 문공(衛文公)의 정(鼎)의 이름 ‘서정(舒鼎)’을 말하는 듯하다. 서정은 위나라의 보물로 매우 중요한 사물이었다.
2) 백붕(百朋) : 많은 돈 또는 큰 보물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다.[旣見君子 錫我百朋]”라는 구절에 보인다. 옛날에는 자개[貝]를 화폐로 썼는데, 5패를 ‘일붕(一朋)’이라 하였다.
3) 산음(山陰)의 흥취 : 산음은 회계산(會稽山)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살았던 곳이다. 왕휘지가 일찍이 산음에 살 때, 눈이 개어 달빛이 환한 밤에 홀로 술을 마시며 좌사(左思)의 〈초은(招隱)〉 시를 읽다가 갑자기 섬계(剡溪)에 살고 있는 벗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즉시 조각배를 타고 밤새도록 찾아갔었는데, 정작 문 앞에 이르러서는 대규를 만나보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이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나는 애초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다. 대규를 만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 何必見戴?]”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에 이를 ‘산음승흥(山陰乘興)’, ‘산음야설(山陰夜雪)’, ‘편주승흥(扁舟乘興)’ 등이라 하여 벗을 찾아가는 전고가 되었는데, 이를 원용하여 한 말이다. 『진서(晉書)』 권80 「왕휘지열전(王徽之列傳)」에 보인다.
4) 초월(楚越) :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와 월나라를 말한다. 두 나라는 중원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를 빌려 이웃과 소원하게 지내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5) 세 오솔길 : 원문의 '삼경(三逕)'은 은사(隱士)의 처소를 가리킨다. 서한(西漢) 말에 장후(蔣詡)가 은거한 뒤 집 안 뜨락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는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두문불출했던 고사가 『三輔決錄』 「逃名」 에 보인다. 이후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이 거칠어졌으나, 솔과 국화는 아직 남아 있네.[三逕就荒 松菊猶存]”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