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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건은 전 원외랑(前員外郎) 권계학(權啓學)이 영상대감(領相大監)에게 올린 장문의 상서 형식의 서한이다. 권계학은 스스로 ‘병처호해(屏處湖海)’하여 낙성(洛城)에 들어오지 않은 지 19년이 되었음을 밝히며, 이제 도성에 머물며 조회에 참여하고 시전(市閭)을 거니는 사이, 마치 요·순 시대의 겸양과 삼대(三代)의 교화와도 같은 성대함을 목도했다고 감격을 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재질은 보잘것없고 학문은 얕아, 성세(盛世)의 버려진 인물로만 남아 군신의 반열에 들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이어 천지와 성현은 버려진 것이 없고, 교화가 미치면 모두 재능을 이루는 법이라 하며, 시대가 버린 인재를 일으키고, 시골에 묻힌 이를 발굴하는 것이 태평시대의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자신을 ‘삼척미명(三尺微命)· 일개고신(一介孤臣)’이라 낮추며, 옛날 추요(芻蕘)의 자문과 공예인의 논의가 있었듯 미천한 신하도 그 부류에 들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자신은 명인 세마공(洗馬公)의 후손이자 명현 신공(申公)의 외손이며, 율옹(栗翁)의 인척으로서, 율옹의 생가에서 태어나 39년을 살았으며, 벼슬한 기간은 9년에 불과하고, 그나마 한위(漢緯)와 함께 벼슬에서 물러나 궁벽한 시골에 칩거한 지 16년이 지났음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는 청명한 세상에 살면서도 성상의 교화를 입지 못해 부자(父子)가 굶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고 탄식하며, 하늘이 자신에게 빈궁한 상(相)을 부여했음을 한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는 많아도 뜻은 여전하며, 마침 영동 지방이 흉년이 들어 생계마저 막막한 현실을 호소하였다. 당초 상소(上疏)하여 곡식을 청할 생각이 있었으나, 문공(文公)의 입경(入京)처럼 정치 참여를 도모하는 대신, 도리어 돌아가려는 뜻을 굳혔다고 토로하였다. 말미에서는 자신이 이번에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벼슬을 구하거나 영달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를 논하고 정사를 의논하며, 음양을 조화시키고, 중화를 협찬하며, 가려진 것을 드러내고 병폐를 막는 방안을 전하고자 함이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니 이 글을 망령된 것으로 보지 말고 관용과 신뢰로 받아줄 것을 간절히 청하며 마무리하였다. 이 글은 권계학(權啓學) 자신의 신분과 가계, 생애 경과, 현 처지를 상세히 기술하며, 정치적·사회적 의견을 직언한 문건으로, 조선 후기 향촌 유학자의 정치 참여 의식과 중앙 권력에 대한 기대, 그리고 사대부의 자의식과 처지를 생생히 드러내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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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上
領相大監 閤下 書
前員外郎權啓學 謹拜手 敬呈書于
相公閤下 啓學屛處湖海 不入洛城者 遽爾十九年矣 今
適住輦下 仰昵朝著上 濟濟德容 俯瞻市閭間 陶生業
如復覩唐虞之揖讓 三代之爻象 窃不勝歡忭蹈舞者也
然而如啓學者 性資譾劣 學識鹵莽 獨爲盛世之棄物 未
隨羣龍之班殿 自不覺望闕太息而已 嗚呼 天地無棄物
聖賢無棄人 露之所潤 草木莫不被其澤 教化之所施 大小
咸得成其材 必也世棄而振舉 野遺而搜求 其果非急務於熙
皞此時者耶 啓學三尺微命 一介孤臣 何敢與論於天時之贊育
國事之輔弼 而古有芻蕘之詢 工藝之論 微軀亦此類也 啓學雖在
海隅 本以名人洗馬公之耳孫 名賢申公之外裔 栗翁姨從之來孫 生
長於栗翁降生之室 釋已三十九年 從宦不過九年 餘越中年
曁子漢緯 遽同閒散 棄蟄窮鄕 又閱十六年矣 只於清明世界
獨未蒙我
聖上盛化之遐霑 將未免我父子抱紅而餓死 玆豈無撫躬發歎也耶
天旣賦余以窮相 嗟乎 其如命何 亦必以疎逖之蹤 樗散之質 不見知於
時 宰相不相合於時 所尙而然矣 今啓學年雖老矣 心尙在焉 適
當嶺之東 荐歉之極 無望保命 初有尙書乞米之意 忘作文公
入京之行 徒愁匏瓜之不食 未見井渫之用汲而 陽春忽開方催
拂袖歸東湖之思 魏闕每仰實小擧帆 遠南山之志 且顧以我東
臣子一未得昵侍天顔 虛老草野 其茹恨尤如何哉 雖然 君子
之用舍行藏 必以其時所以浩然長歸 死於牖下者宜矣 肆效古人
之行 披盡心腹猥呈一書 非欲以九二之術 九售於高門也 是故不於
銓掄之堂 而特於揆席之前者 槪以論道議政 調陰燮陽 輔
相天地之宜 協贊中和之氣 闡揚沉晦 俾无感傷底道理故也
伏惟
執事恢弘恕諒 幸勿視之以狂妄也 啓學 再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