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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46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80년 송덕상 간찰 / 宋德相 簡札
- ㆍ발급자
-
송덕상(宋德相)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8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80년 2월 12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庚子 二月 十二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3.7 × 4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경자년(1780) 2월 12일에 세말(世末) 송덕상(宋德相, 1710~1783)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경자년(1780) 2월 12일에 세말(世末) 송덕상(宋德相, 1710~1783)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世末’로 표현하여 평교간으로서 집안끼리 세의(世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權正郞 記室’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정랑(正郎)’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때 그는 이미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을 끝으로 관직에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한 이후이다. 그는 1765년 12월 22일 연원도 찰방에 제수되기 이전 5월 14일에 병조정랑에 제수된 이력이 있고, 『정유식년사마방목(丁酉式年司馬榜目)』에 실린 셋째 아들 만회(晩悔) 권한옥(權漢玉, 1748~?)의 1777년 진사시 입격 정보에 그의 부친의 관함을 “통훈대부 전행병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通訓大夫前行兵曹正郎兼春秋館記注官)”으로 기재한 것으로 보면 피봉의 ‘권정랑’은 확실히 권계학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의 전함(前銜)으로 택호를 삼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본문에서 언급된 ‘지난 직명이 끝내 해직됨을 입었다.[向來職名 終蒙許解]’라고 한 것은, 전 해인 1779년(정조 3) 9월경에 ‘이조판서’ 실직에 제수된 뒤로 걸귀소(乞歸疏)나 사직소(辭職疏)를 지속적으로 올렸고 같은 해 12월 6일에 한직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도 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듬해인 1780년(정조 4) 3월 15일에 홍국영(洪國榮)의 사직을 만류한 죄로 논죄를 청하기 위해 올린 상소에서 “주상의 자세한 헤아림을 입어 전직(銓職, 이조판서)에서 체직을 허락받았습니다.[伏蒙聖慈終始曲諒 許遞銓職]”라고 하여 이조판서에서 해직된 일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남에 관한 일’은 정확한 경위는 미상이나, 『승정원일기』 <1782년(정조 6) 2월 17일> 대신‧비국당상 입시 때 정언(正言) 이택징(李澤徵)의 소회(所懷) 가운데, “송덕상의 행위는 일마다 흉참합니다. 강릉유생 심상현이라는 자는 고 판서 심언광의 자손으로 …… 또 상현의 집에 그 선조 언광의 사당을 홀연히 ‘하남서원’이라고 칭하며 두 정부자(程夫子)를 주벽에 걸기를 새롭게 획책하여 마침내 사사롭게 두 정부자의 판위를 만들어 걸고, 또 선정신 송시열의 위판과 그의 선조 심언광의 위판을 좌우에 열치하여 동서 배위를 나누어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상현이 덕상과 논의를 왕래하여 이러한 거조가 있었습니다.[德相所爲 事事凶慘 江陵儒生沈尙顯者 卽故判書沈彦光之子孫 …… 且於尙顯之家 以其先祖彦光之祠堂 忽稱河南書院 而新畫兩程夫子 主壁出掛 仍又私造兩程夫子位版 奉安於其前 又以先正位版及其祖彦光之位版 列置左右 分作東西配位 此皆尙顯之往議德相 有此擧措 ……]” 라는 구절이 있고, 뒤에 “이 때문에 사론이 크게 일어 서로 쟁변하여 더러는 복합 상소를 했지만 끝내 임금께 올리지 못했고, 더러는 태학에 정소해도 채시(採施)되지 못했으니 송덕상의 기세로 문객을 비호하고 사론을 배척하는 소치가 있게 된 것이 아님이 없었으나 상현도 서원을 창건하려는 계획이 끝내 성취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았고 …… [以致士論大起 互相爭辨 或抱疏叫閽 而終未入徹 或呈籲太學而不見採施 此莫非德相之伊時氣勢 有足以庇護門客 排斥士論之致 尙顯亦知創院之計 終難成就]”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 송덕상의 원조로 강릉심씨 문중의 심상현(沈尙賢)이 그의 선조인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사당을 새로 짓고 서원을 보수하려 했던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간찰이 발급된 때에는 여러 반론을 겪으면서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지역 양반들의 물력을 원조 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발급자 송덕상은 자는 숙함(叔咸), 호는 과암(果菴), 본관은 은진(恩津), 부친은 송무원(宋婺源)이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현손이다. 그는 1753년(영조 29) 3월 23일에 좌의정 이천보의 천거로 계방(桂坊, 世子翊衛司)에 조용되어 세마(洗馬)를 제수 받고, 이후 자의(諮議)·조지서별제‧지평‧동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한성부좌윤·좨주‧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상대의 편지를 받고 이를 통해 신춘(新春)에 일상생활이 좋다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했다. 자신은 새해가 된 뒤 나이만 더 먹어 부끄럽다고 하면서, 자신의 직명이 끝내 해직된 일, 현재 병이 낫지 않아 나날이 신음만 일삼는다는 등의 근황을 전했다. 선조의 비명(碑銘)을 지어달라는 상대의 부탁은 어찌 감히 미룰 수 있겠냐고 하면서도, 질병 등의 연고가 자주 이어지고 접빈객 하는 일도 번다하여 여전히 짓지 못했다고 하였고, 틈을 내어 글을 지어 보내드릴 것이니 우선 너그럽게 용서 해 달라고 하였다. 하남(河南)에 관한 일은 심씨(沈氏) 집안에서 별묘(別廟)를 영건(營建)하고 또 장차 구당(舊堂)도 보수한다고 하니 매우 좋은 일이지만 단지 일이 끝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대가 따뜻해 진 뒤 찾아오겠다고 한 말은 자신도 기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추록에는, 하남에 관한 일은 심씨가 중수(重修)와 별건(別建) 두 가지 일을 다 성취하려 하는데, 다만 사림(士林)들도 송원(松院, 松潭書院)에 임치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자신들이 힘을 합해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했다.
- · 『正祖實錄』 『承政院日記』 『丁酉式年司馬榜目』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고) 349.16 사마정유])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伏承下狀 就審新春 尊候動止增祉 區區仰慰且賀 世下 逢新之感 添齒之愧 自憐柰何 向來職名 終蒙許解 感祝無窮 見今賤疾未愈 日事呻痛 寧有强起 趨朝■(之)望也 承諭莫知所以奉對也 先銘旣承辱托 何敢遷就爲事 而疾故頻仍 人客酬應亦煩 尙稽泚筆 慚悚無已 謹當圖隙搆拙以呈 姑賜寬恕 至仰至仰 河南事 沈氏方營別廟 又將修■(改)舊堂云 甚善甚善 今則雖岐異■(年) 亦豈長時作戱耶 待其竣事之外 無他道矣 承諭臨顧於春和後 豈勝凝企 而遠地事有不可必 是用馳慮萬萬 惟祈對序加重 不宣 伏惟下照 謹拜上謝狀 庚子 二月 十二日 世末 宋德相 頓首頓首 河南事先付沈氏 使之重修別建二事 排當成就 以爲自新之圖 而第士林亦不可任置松院 若合力以圖 則事甚■(便)宜 未知如何
權正郞 記室 入納 ■(肅) [手決]謹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