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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43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7년 권탁 간찰 / 權拓 簡札
- ㆍ발급자
-
권탁(權拓, 1724~)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8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67년 8월 1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亥 八月 吉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3.5 × 49.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67년 권탁이 권계학의 부탁(과거시험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에 대해 들어줄 수 없는 상황임을 알리는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정해년(1767) 8월 1일[吉日]에 종말(宗末) 권탁(權拓, 1724~?)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宗末’로 표기하여 수신자와는 같은 문중(안동권씨) 출신의 종친 관계를 나타내었으므로 ‘拓’은 ‘權拓’임을 알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驪江 謝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의 거주지가 여강(驪江, 驪州)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連原郵軒’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 도정(親臨都政)에서 연원도 찰방에 제수된 뒤 이 관직을 끝으로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찰방에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상대의 부탁’은 이 간찰의 내용만 봐서는 정확한 정황을 알 수 없다. 단지 수신자는 발급자의 인맥을 통해 강신에게 모종의 부탁을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가 시소로 곧장 갔다는 말을 통해 과거와 관련된 정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미상이다. 『승정원일기』를 참조하면 이 때 여주목사에 부임한 인물은 김면행(金勉行, 1702~1772)으로 확인된다. 또한 권계학이 부임한 ‘연원도’는 충청도 충주 소재의 연원역(連原驛)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여주, 남쪽으로 문경 등지, 동쪽으로 제천, 동남쪽으로 청풍‧단양을 잇는 역도이다. 속역은 단월(丹月)‧인산(仁山)‧감원(坎原)‧신풍(新豐)‧안부(安富)‧가흥(可興)‧용안(用安)‧황강(黃江)‧수산(水山)‧장림(長林)‧영천(令泉)‧오사(吾賜)‧천남(泉南)‧안음(安陰)의 14개 역이 있다. 따라서 발급자는 자신이 충주로 갈 때 상대가 재직하고 있는 연원도 우관에 들리겠다고 한 것이다. 발급자 권탁은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용(權瑢), 거주지는 여주(驪州)이며, 1765년(영조 41) 을유 식년시 생원 2등으로 입격한 이력이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1799년 4월 27일과 10월 13일에 각각 올린 충청도 유생 연명상소에 유학의 직역으로 연서되어 있음이 확인되는데, 동일인물 여부는 미상이다. 이 간찰의 본문에서 여주목사를 직접 상대할 수 있었던 정황으로 보면 해당 지역에 세거한 양반가의 일원으로 볼 수 있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여러 해 상대를 만나지 못하던 중 편지를 받고 서늘한 가을에 기거생활이 여러모로 편안하다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했다. 자신은 병으로 칩거하며 지내는 근황을 언급했다. 상대가 부탁한 일에 관해 강신(江臣, 여주목사 추정)이 서울에서 곧장 시소(試所)로 가버려서 자신과 상대할 길이 없으므로 계획대로 하기 어렵다고 했다. 가을 강에 뱃놀이 할 때 상대가 와 준다면 좋은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조만간 예성(蘂城, 충주)으로 가는 편에 상대의 우관(郵館)에 나아가 문후 드리겠다고 했다.
- · 『承政院日記』 『大典通編』 「吏典‧外官職」 <忠淸道>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積年違範 尋常悵仰 卽拜惠狀 謹審秋涼 起居萬安 慰感何極 宗末 病蟄憒憒 無復可言 示意奉悉 而昨聞江臣 自京直向試所 在此無相對之路 恐難如計耳 秋江一棹 如蒙枉顧 則可做丘園勝會 而豈敢望耶 早晩如作蘂城之便 可進候郵座矣 餘姑不宣謝式 下照 謹謝上 丁亥 八月 吉日 宗末 拓 拜手
連原郵軒 回納 驪江 謝狀 [着圖書] [手決]謹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