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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38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위답(慰答)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6년 박취원·박지원 간찰 / 朴取源·朴志源 簡札
- ㆍ발급자
-
박취원(朴取源, 1716~)
박지원(朴志源, 1718~)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66년 12월 17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丙戌 臘月 十七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6.2 × 47.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66년 12월 17일에 고애자(孤哀子) 박취원(朴取源, 1716~?)‧박지원(朴志源, 1718~?) 형제가 조문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위답이다.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병술년(1766) 12월 17일에 고애자(孤哀子) 박취원(朴取源, 1716~?)‧박지원(朴志源, 1718~?) 형제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孤哀子’로 표기하여 당시 친상(親喪)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平洞 朴喪人 謝疏’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평동(平洞, 현 서울시 종로구)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連原郵軒’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 도정(親臨都政)에서 연원도 찰방에 제수된 뒤 이 관직을 끝으로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찰방에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 기록된 ‘孤哀子’, ‘哀感’, ‘荒迷不次’, ‘疏上’과 같은 단어들은 친상을 당한 상주가 간찰을 작성할 때 주로 쓰는 용어들이다. 또한 본문의 내용을 통해 당시 관인들끼리 세의나 선물을 주고받던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말미에 언급된 ‘폄목(貶目)’의 경우, 보통 6월과 12월에 정기적으로 관원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전최(殿最, 褒貶)에서 각 관사의 장이나 각 도의 관찰사가 소속 관원의 성적을 4자 또는 8자로 평가한 제목(題目)을 계본(啓本)으로 작성하여 상달했는데, 이 전최계본(殿最啓本)에 기록된 제목의 내용이 긍정적일 경우 ‘포목(褒目)’, 부정적일 경우 ‘폄목’이라고 하였다. 평가는 제목의 내용에 따라 상‧중‧하로 매겨졌는데, 외관(外官)의 경우 총 8자에서 각각 4자와 4자씩 이루어진 제목이 모두 긍정적이면 상, 둘 중 하나가 부정적이면 중, 모두 부정적이면 하로 나누었다. 따라서 본문의 해당 내용은 12월 전최에서 권계학의 점수를 발급자가 확인한 뒤 이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거토(居土)’는 ‘거중(居中)’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적이 ‘중고(中考)’였음을 알 수 있다. 발급자 박취원은 자는 숙봉(叔逢), 본관은 반남(潘南), 부친은 박사설(朴師卨)이다. 1755년(영조 31) 을해 정시 병과 5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지평‧헌납‧응교‧은계찰방‧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박지원은 자는 계인(季仁)이고 박취원의 아우이다. 1756년(영조 32) 병자 정시 병과 20위로 급제한 뒤, 삼사의 청요직 및 고산찰방(高山察訪)‧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대사간‧공조참의‧양성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지난번 상대가 방문 해 준 일은 오래 격조한 뒤끝에 있었던 일이기에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하면서, 즉일에 또 상대의 편지를 받으니 매우 위로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요즘 섣달 추위에 정무 보는 생활이 계절에 맞게 더욱 좋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한결같이 구차하게 살면서 다시 연말을 맞이하니 무너지는 슬픔에 다시 어버이께서 돌아가신 때가 엊그제인 듯하다고 하며 친상을 당한 슬픔 감정을 드러내었다. 상대가 보내준 여러 음식물들은 매우 감사하여 어떻게 사례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했다. 감사의 폄목(貶目)을 보고서야 상대가 ‘거토(居土)’를 맞았음을 알았으니 개탄스럽다고 했다.
- · 『承政院日記』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진한엠앤비, 2015(국토지리정보원 사이트 pdf)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지명사전(https://history.seoul.go.kr/archive/main.do?key=2210200004)
참고자료
원문
稽顙 向蒙左顧 出於積阻之餘 迨今感幸 卽又拜惠疏 殊慰餘耿 近審窮寒 政履對時增相 孤哀子 一味苟活 又逢歲窮 撫時慟隕 益復如新 奈何奈何 俯饋諸種 意摯物厚 寔出望外 千萬哀感 不知所以仰謝也 卽見貶目 始知有居土 不勝慨咄 惟希餞迓增休 荒迷不次 謹疏 丙戌 臘月 十七日 孤哀子 朴取源 志源 等 疏上
連原郵軒 記室 回納 平洞 朴喪人 謝疏 稽顙謹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