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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37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7년 서명천 간찰 / 徐命天 簡札
- ㆍ발급자
-
서명천(徐命天, 1720~1772)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67년 8월 8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亥 八月 初八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3.8 × 40.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67년 8월 8일에 복인(服人) 서명천(徐命天, 1720~1772)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정해년(1767) 8월 8일에 복인(服人) 서명천(徐命天, 1720~1772)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服人’로 표기하여 당시 복상(服喪)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會洞 徐參議 候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회동(會洞, 현 서울시 중구 회현동 일대)에 거주했고, 성은 ‘서씨’이며, 당시 ‘참의(參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延原察訪’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連原察訪’의 오기이다. 이를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 도정(親臨都政)에서 연원도 찰방에 제수된 뒤 이 관직을 끝으로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찰방에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신자 정보가 기재된 아래에는 한글로 ‘츙ᄌᆔ’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연원도가 속해 있는 충주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언급된 ‘인산역’은 충청도의 역도(驛道)인 연원도의 속역이다. 즉 연원도는 충주 소재의 연원역(連原驛)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여주, 남쪽으로 문경 등지, 동쪽으로 제천, 동남쪽으로 청풍‧단양을 잇는 역도로서, 속역은 단월(丹月)‧인산‧감원(坎原)‧신풍(新豐)‧안부(安富)‧가흥(可興)‧용안(用安)‧황강(黃江)‧수산(水山)‧장림(長林)‧영천(令泉)‧오사(吾賜)‧천남(泉南)‧안음(安陰)의 14개 역이 있다. 발급자는 중앙의 현직 관료이긴 하나 정식적인 노문(路文)이 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적인 여행을 위해 역도의 찰방에게 자신의 편의를 봐 줄 역리와 수행인의 노구까지 제공 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찰방은 공적 업무 외에도 중앙 관료의 사적인 원조나 청탁 등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발급자 서명천은 자는 낙보(樂甫), 본관은 대구(大丘), 부친은 서종섭(徐宗燮)이다. 1747년(영조 23) 정묘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하고, 1751년(영조 27) 신미 정시 을과 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교리‧대사간‧부수찬‧승지‧응교 등을 지냈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조금 서늘한 기운이 드는 이때에 상대의 기거생활은 편안하신지 묻고는 우관에서 몇 해를 지내며 여전히 침굴(沈屈)하고 있는 점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자신은 괴산(槐山)에 우거하는 종형(從兄)의 상을 지난달에 당해 그믐 전에 가서 곡하고 영외(嶺外)로 가서 의원을 찾을 계획을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언급하며, 미리 인산역(仁山驛)의 해당 역리(驛吏) 등처에 곧바로 분부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자신의 일행이 데리고 가는 수행인도 적지 않기에 별도로 노구(路具)도 원조 해 달라고 하였다.
- · 『承政院日記』 『大典通編』 「吏典‧外官職」 <忠淸道>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진한엠앤비, 2015(국토지리정보원 사이트 pdf) 김경숙, 「조선후기 察訪의 驛站 운영과 관직생활 -19세기 초 金載一의 『黙軒日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지명사전(https://history.seoul.go.kr/archive/main.do?key=2210200004)
참고자료
원문
卽惟微涼 起居安重 經年郵館 尙此沈屈 爲之歎嘅 服人 月前遭槐山寓居老從兄之喪 今晦前大擬往哭 轉作嶺外尋醫之計 旣有前言 預卽分付於仁山驛該吏等處 如何如何 一行所率亦不少 諒悉另助路具 如何如何 下去漢亦卽往復矣 姑此不宣 伏惟照下 謹狀上 丁亥 八月 初八日 服人 命天 頓
延原察訪 記室 卽傳納 【츙ᄌᆔ】 會洞 徐參議 候狀 [着圖書] 省式謹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