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1766년 조덕수 간찰(趙德洙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36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6년 조덕수 간찰 / 趙德洙 簡札
- ㆍ발급자
-
조덕수(趙德洙, 1714~1790)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丙之九月 十三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7.5 × 43.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병술년(1766) 11월 4일에 종말(宗末) 권제응(權濟應, 1724~1792)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병술년(1766) 11월 4일에 종말(宗末) 권제응(權濟應, 1724~1792)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宗末’로 표기하여 수신자와는 같은 문중(안동권씨) 출신의 종친 관계를 나타내었으므로 ‘濟應’은 ‘權濟應’임을 알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黃江 謝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황강(黃江)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連原郵軒’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 도정(親臨都政)에서 연원도 찰방에 제수된 뒤 이 관직을 끝으로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찰방에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단월역은 수신자 권계학이 부임한 연원도의 속역이다. 역에 소속된 인원으로는 역리와 역노가 있었는데, 특히 역노는 입마(立馬, 말을 길러 공용으로 바치는 일)와 태운(駄運, 말에 짐을 실어 나르는 일) 및 잡역 등의 신공을 역에 바쳤던 역졸이었다. 따라서 원문의 ‘丹月驛漢’은 말을 거래하여 역에 바치는 등의 일을 한 정황으로 봤을 때 단월역 소속의 ‘역노’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의 상황은 결국 해당 역노가 애초에 관에는 41냥을 받아 가서 발급자와 40냥에 거래한 뒤 말을 납부하고 차액인 1냥을 착복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역도의 특성상 해당 관과 일반 사인 간에 말을 거래한 정황 등 찰방의 업무 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의 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급자 권제응은 자는 인백(仁伯)‧원박(元博), 호는 지안와(知安窩),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양성(權養性)이며,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증손이다. 1754년(영조 30) 숭릉참봉(崇陵參奉)을 시작으로, 동복현감‧김제군수‧삼척부사‧선공감부정‧연안부사‧충주목사‧감찰‧보은현감‧진주목사‧사도시첨정‧면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동 문중 소장 간찰 가운데 <무자년(1768) 4월 6일에 권진응(權震應) 간찰>의 발급자인 산수헌(山水軒) 권진응과는 사촌지간이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의 6월 3일에 삼척부사에 제수되었고, 이후 1774년까지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이 해 11월 상간에 관직을 그만두고 청풍(淸風, 제천) 황강(黃江)으로 낙향하여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황강은 충청도의 역도(驛道)인 연원도의 속역이 있던 곳이다. 즉 연원도는 충주 소재의 연원역(連原驛)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여주, 남쪽으로 문경 등지, 동쪽으로 제천, 동남쪽으로 청풍‧단양을 잇는 역도로서, 속역은 단월(丹月)‧인산(仁山)‧감원(坎原)‧신풍(新豐)‧안부(安富)‧가흥(可興)‧용안(用安)‧황강‧수산(水山)‧장림(長林)‧영천(令泉)‧오사(吾賜)‧천남(泉南)‧안음(安陰)의 14개 역이 있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서로 격조한 가운데 뜻밖에 상대의 편지를 받고 조금 추워진 이때에 정무 보는 생활이 편안하다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관직을 파하고 돌아와 근래에 한가롭게 지내기를 마치 빈 배[虛舟]와 같은 분수를 얻었다고 했다. 말과 관련한 일에 대해, 당초에 단월역(丹月驛)의 역노(驛奴)가 41냥으로 가격을 정해 받아갔다가 3일 뒤에 관에서 물리라 했다고 하며 끌고 와서는 환퇴(還退)하고 돌아갔는데, 또 4,5일이 지난 뒤 누군지 모르는 어떤 놈이 40냥에 사 가기를 청하기에 방매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상대의 편지를 받아보고 비로소 앞서 그 역노가 안면만 바꿔 와서 가격을 깎아 사 간 뒤 역에 납부했다는 점을 알게 되어 그 정황이 매우 통탄할 만 하다고 했다. 그래서 애초에 관에서 출급했던 가격이 얼마인지 묻고는, 자신은 40냥만 받고 팔았으므로 기존 가격이 혹 이 가격보다 넘는다면 차액만큼을 헤아려 보내 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관에서 환수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을 듯 하다는 등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 · 『承政院日記』 『大典通編』 「吏典‧外官職」 <忠淸道> 김경숙, 「조선후기 察訪의 驛站 운영과 관직생활 -19세기 초 金載一의 『黙軒日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阻仰中 料外承拜惠札 就審稍寒 政履安勝 區區不任慰■(荷) 濟應 罷官而歸 近覺安■(閒) 便同虛舟之自去私分 還可幸也 鬣者當初丹月驛漢 定價以四十一兩而捧去矣 ■(過)三日 謂之自官退却而牽■(來) 還退而去矣 過四五日後 不知何許漢 捧價四十兩而來請買去 故果放賣矣 今承所示 始知驛漢換面而來■(到) 削價買去 納之於驛 其情狀萬萬絶痛也 未知自官出給之價 爲幾許耶 此則只捧四十兩而賣之 自官出給之價 如或過此 則餘數推送日間無妨 不然則自官還收 亦未爲不可矣 如何如何 餘姑不宣 伏惟下照 謹謝狀上 丙戌 至月 初四日 宗末 濟■(應) ■…■
連原郵軒 記室 回納 黃江 謝狀 [着圖書] [手決]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