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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년 신회 간찰(申晦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34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7년 신회 간찰 / 申晦 簡札
- ㆍ발급자
-
신회(申晦, 1706~)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67년 6월 4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亥 六月 初四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8.3 × 42.7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67년 6월 4일 신회(申晦, 1706~?)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정해년(1767) 6월 4일에 신회(申晦, 1706~?)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본문에서 상대에 대해 자신을 ‘僕’으로 표기하는 등 상대와 평교간이면서 다소 연배가 높은 인물로 추정된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吏判 候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이조판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連原郵軒’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 도정(親臨都政)에서 연원도 찰방에 제수된 뒤 1767년말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찰방에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발급자 신회는 자는 여근(汝根), 본관은 평산(平山), 부친은 신사철(申思喆)이다. 1741년(영조 17) 신유 식년시 진사 2등으로 입격하고, 1743년(영조 19) 계해 알성시 병과 2위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수찬‧교리‧승지‧병조판서‧예조판서‧황해도관찰사‧이조판서‧좌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소식이 격조하여 그립던 중에 문득 편지를 받고 초여름에 정무 보는 생활이 여러모로 좋다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여러 날 분주하고 바쁘게 다니느라 근력이 거의 소진되었다고 하는 등 근황을 전했다. 상대가 보내준 각종 물건은 매우 감사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당시 관인들끼리 세의나 선물을 주고받던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 · 『承政院日記』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阻詠中 忽承耑札 伏審初炎 政履萬勝 慰謝洽至 僕 逐日奔忙 筋力殆盡 自憐柰何 所惠各種 可想勤念 伏良多荷 無以爲謝 餘極忙不宣 姑惟盛照 謝上狀 丁亥 六月 初四日 晦 頓
連原郵軒 回納 吏判謝狀 [着圖書] [手決]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