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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32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6년 조명정 간찰 / 趙明鼎 簡札
- ㆍ발급자
-
조명정(趙明鼎, 1709~177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66년 9월 21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丙戌 九月 卄一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9.7 × 46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66년 9월 21일에 복인(服人) 조명정(趙明鼎, 1709~1779)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연원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병술년(1766) 9월 21일에 복인(服人) 조명정(趙明鼎, 1709~1779)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服人’로 표기하여 당시 복상(服喪)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吏判 候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이조판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連源郵軒’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볼 수 있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兼春秋)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 도정(親臨都政)에서 연원도 찰방에 제수된 뒤 이 관직을 끝으로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찰방에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에 언급된 어용림(魚用霖, 1721~?)은 자는 경택(景澤), 본관은 함종(咸從), 부친은 어석윤(魚錫胤)이며,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의 손자이다. 1759년 기묘 식년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하였고, 의릉참봉(懿陵參奉)‧봉사‧동몽교관‧사복시주부‧영춘현감(永春縣監)‧공주판관 등을 역임했다. 그가 사복시주부에 제수된 시기는 1765년(영조 41) 12월 22일로, 이 간찰이 발급된 해에도 주부에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명정과 어용림의 관계를 살펴보면, 조명정의 숙부 조정서(趙正緖)의 딸이 어석윤(魚錫胤)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어용림이므로, 어용림은 조명정의 종매의 아들이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종생질[從甥]’이라고 언급 한 것이다. 또한 어용림의 아내는 반남박씨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딸인데, 박필균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조부이다. 그는 1760년에 사망하므로 그의 딸이 분곡하러 간 이유는 모친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미상이다. 이 내행이 금천(金遷)의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1641~1708)의 집안에 머물고 있다고 한 것은, 이기홍의 장인이 반남박씨 박세훈(朴世塤)으로 집안끼리 혼반관계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내행이 머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금천은 충주 소재지로 연천(淵遷)이라고도 하며, 연원역(連原驛)이 있던 곳이므로 연원찰방의 관할 역에 포함되는 곳이다. 따라서 발급자는 어용림 내행이 머물고 있는 충주 금천의 관할 찰방인 권계학에게 본문의 내용에서처럼 사적인 지공(支供)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당시 찰방은 공적 업무 외에도 중신(重臣)의 사적인 원조나 청탁 등도 관행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발급자 조명정은 자는 화숙(和叔‧和淑), 호는 노포(老圃), 본관은 임천(林川), 부친은 조정순(趙正純)이고, 익익재(翼翼齋) 홍봉한(洪鳳漢)과 사돈지간이다. 1735년(영조 11) 을묘 증광시 생원 3등으로 입격하고, 1740년(영조 16) 경신 대증광시 갑과 2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다시 1746년(영조 22) 병인 중시 병과 2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지‧충청도관찰사‧이조참의‧대사간‧대사성‧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이조판서‧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노포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풍고집(楓皐集)』에 실린 「이조판서조공시장(吏曹判書趙公諡狀)」에 따르면 그는 1766년 여름에 “이조판서에 특제되었다[旋特除吏曹判書]”라는 기록이 확인되므로, 이 간찰의 피봉에 자신을 ‘이판’이라고 하였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 간찰은 좌측의 일부가 결락되고 하단의 일부가 충해를 입어 일부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앞뒤 맥락으로 결락된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지난번 상대와 헤어진 뒤 소식이 막혀 우울했다고 하면서,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도는 이때에 우관(郵館)에서 정무 보는 안부가 어떠한지 물었다. 자신은 어버이 모시며 대충 잘 지내고 있고, 이번에 외람되게 한 자리를 맡아 요란하고 근심하며 지내고 있는 등의 근황을 전했다. 자신의 종생질인 주부(主簿) 어용림(魚用霖)의 내행이 분곡(奔哭)하러 가는데, 노인 모시고 안살림을 맡고 있는[主饋] 사람이어서 3, 4일 정도만 머물고 돌아갈 것이지만, 그의 친가는 가난하고 서울에서 식량을 넉넉히 싸 갈 수 없기에 많은 인마가 굶주리게 되어 염려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상대가 만일 부탁을 받게 된다면 쌀 5말, 콩 3말과 약간의 찬물(饌物)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머물고 있는 곳은 금천(金遷) 이 생원 집으로 고 집의(故執義) 직재(直齋) 이 공(李公, 李箕洪)의 집안임을 언급 하였다.
- · 『承政院日記』 金祖淳, 『楓皐集』 卷14 김경숙, 「조선후기 察訪의 驛站 운영과 관직생활 -19세기 초 金載一의 『黙軒日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6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인물관계정보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참고자료
원문
一別阻音 悵菀徒切 比日秋凉 郵履何似 遠惟對時增衛 記末 粗保親側 而猥叨匪據之事撓惱 悶憐柰何 少懇 從甥魚■(主)簿用霖室內 方作奔哭之行 ■(而)奉老主饋之人 不能爲久住 計留連三四日 當卽復路 而聞其親家赤貧 自京亦不能優裹粮 ■■(臨發)前 許多人馬之飢餒 極可念 ■■(若有)委書奉托 幸以米五斗 太三斗 若干饌物 主人覓助 以爲留粮之地 如何如何 ■…■(事甚緊切 ■■■副 切仰切仰 ■…■) 居所住處 乃是金遷■■(李生)員家 故執義直齋李公■■(之後) 餘因其行忙倩 姑不宣 ■■(伏惟)崇照 謹候狀 丙戌 九月 卄一日 服人 明鼎 頓
連源郵軒 傳納 吏判 候狀 [着圖書] [手決]謹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