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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년 김응순 간찰(金應純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26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7년 김응순 간찰 / 金應純 簡札
- ㆍ발급자
-
김응순(金應純, 1728~1774)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67년 4월 30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亥 四月 三十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2.7 × 40.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정해년(1767) 4월 30일에 김응순(金應淳, 1728~1774)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기 위해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정해년(1767) 4월 30일에 김응순(金應淳, 1728~1774)이 상대의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기 위해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이름을 그대로 직서하여 수신자와 평교간 정도로 추정된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嶺伯 候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경상도관찰사에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權察訪宅’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찰방(察訪)’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추정된다. 그는 1765년 10월 27일에 겸춘추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12월 22일 친림도정에서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에 제수된 뒤 이 관직을 끝으로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하였다. 찰방에서 해직된 정확한 시기는 미상이나 이 간찰이 발급된 해가 그의 찰방 제수 연도와 약 2년 정도 차이 나므로 피봉의 ‘권찰방댁’은 확실히 권계학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의 전함(前銜)으로 택호를 삼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발급자 김응순은 자는 회원(會元),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김이건(金履健)이다. 안산(安山)에 거주하였다. 1753년(영조 29) 계유 정시 병과 1위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1774년(영조 50) 갑오 등준시(登俊試)에 행도승지(行都承旨)로서 병과 4위로 급제한 이력이 있다. 그는 지평‧정언‧경기어사‧광주부윤‧경상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의‧대사헌‧도승지‧이조참판‧호조참판‧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고, 후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특히 그가 경상도관찰사에 부임한 해는 1766년으로, 이 간찰은 그가 부임한 이듬해에 발급된 것이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 간찰은 일반적인 간찰과는 달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즉, 본문은 단지 ‘삼가 문안드린다[謹問安]’고 적고 있고, 연월일과 발급인을 표시한 다음 끝에 수신자에게 보낸 선물의 물목으로 “각종 부채 5자루[各色扇伍柄]”를 후록하였다. 이러한 양식으로 봤을 때, 이 문서를 크게 간찰의 범주로 볼 수는 있더라도, 단지 선물을 보내기 위한 목적만으로 간단히 작성한 점을 강조하여 별도의 문서 양식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시기의 인물인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 권18 <1771년(영조 47, 신묘) 5월 11일> 조 기사에 “경상감영의 저인이 경상감사가 류군필에게 보낸 편지 및 각 색 부채 5자루를 가지고 와서 주며 군필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듣기에 편지 안에는 다만 ‘근문안’ 세 자와 ‘연월일, 성명’만 썼을 뿐이라고 한다. 근래에 모두 번거롭고 바쁘다는 핑계로 문안 서찰에 이렇게 대충 쓰니 우습다.[嶺營邸人 以嶺伯所送柳君弼書 及各色扇五柄來納 轉送于君弼許 聞書中只書謹問安三字 具年月日姓名而已 近來皆諉繁劇 草草書問如此 可笑也]”라고 한 내용 및 같은 책 권27의 <1779년(정조 3, 기해) 1월 12일> 조 기사에도 “관서백 김종수 대감이 …… 아마도 바빠서 편지의 내용을 다 갖추지 못하고 다만 ‘근문안’세 자를 쓰고, 끝에는 민어 1마리, 석어 2두릅, 방촉 5쌍, 남초 20근을 썼으니, 지난 해 12월 8일에 보낸 편지이다. ……[關西伯金台鍾秀 …… 盖悤劇不能成全書 只書謹問安三字 尾以民魚一尾 石魚二束 房燭五雙 南草十二斤 卽去年十二月八日出者 ……]”라고 한 내용을 토대로 18세기 중후반경 감사나 지방관이 사인에게 특정 물품을 선물로 보내면서 잠시 이러한 양식이 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근문안’ 세 자만 쓰는 것은 관료가 공무에 바쁜 나머지 간찰의 내용을 다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선물로 지급된 ‘각색선(各色扇)’의 경우 시기상 ‘절선(節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절선은 단오절이 가까워지면 통상적으로 진상 또는 하사하는 부채로서 고문헌에서는 ‘절삽(節箑)’이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지방에서 왕실에 진상하는 것 외에도 이것이 생산되는 지방 수령이 중앙의 중신(重臣)‧관찰사 등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특히 정조 대에는 5월에 치러진 성균관 유생 응제시의 상품으로 반사한 기록도 있으며,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단오 때 통영에서 진상하는 부채가 200여 자루에 지나지 않다가 19세기 중엽에는 4배로 불은 사실 등이 있어 그 당시 진상방물이나 하사품 등으로 요긴하게 사용된 물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간찰의 내용을 통해 단오절 절선은 관찰사가 일반 사인에게 주는 선물로도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 · 『承政院日記』 『日省錄』 『國朝文科榜目』 卷16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黃胤錫, 『頤齋亂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록유산 DB)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부, 『各司謄錄』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謹問安 丁亥 四月 三十日 金應淳 頓 [各色扇伍柄]
權察訪宅 入納 嶺伯 候狀 [着圖書] [手決]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