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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맹지대 간찰(孟至大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25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87년 맹지대 간찰 / 孟至大 簡札
- ㆍ발급자
-
맹지대(孟至大, 1730~1793)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87년 12월 26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未 臘月 卄六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9.4 × 39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정미년(1787) 12월 26일에 복인(服人) 맹지대(孟至大, 1730~1793)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정미년(1787) 12월 26일에 복인(服人) 맹지대(孟至大, 1730~1793)가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服人’로 표기하여 당시 복상(服喪) 중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름을 그대로 직서하여 수신자와 평교간 정도로 추정된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東閣 候書’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는 당시 지방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權正郎宅’이라는 기록을 통해 수신자는 안동 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정랑(正郎)’에 재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발급연도 등으로 추정하면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때 그는 이미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을 끝으로 관직에 물러나 고향인 오죽헌으로 낙향한 이후이다. 그는 1765년 12월 22일 연원도 찰방에 제수되기 이전 5월 14일에 병조정랑에 제수된 이력이 있고, 『정유식년사마방목(丁酉式年司馬榜目)』에 실린 셋째 아들 만회(晩悔) 권한옥(權漢玉, 1748~?)의 1777년 진사시 입격 정보에 그의 부친의 관함을 “통훈대부 전행병조정랑겸춘추관기주관(通訓大夫前行兵曹正郎兼春秋館記注官)”으로 기재한 것으로 보면 피봉의 ‘권정랑댁’은 확실히 권계학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의 전함(前銜)으로 택호를 삼아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발급자 맹지대는 자는 양여(養汝), 본관은 신창(新昌), 부친은 맹숙주(孟淑周), 세종 때 명신인 맹사성(孟思誠)의 후손이다. 1773년(영조 49) 계사 대증광시 병과 8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김천찰방‧장령‧교리‧승지‧강릉현감‧병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특히 이 간찰이 발급된 해는 그가 강릉현감으로 부임한 시기로, 『강릉부사선생안(江陵府使先生案)』에 따르면 이 해 7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1788년 12월 전최(殿最)에서 중(中)을 맞고 거관(去官)하였는데, 이때 포폄제목은 “혜정을 많이 시행했으나 천금을 들여 객사를 수리함[多行惠政千金修客舍]”이었다. 또한 1782년(정조 6)에 일어난 이택징(李澤徵) 역모사건으로 인해 8월 19일 강릉부에서 강릉현으로 강등되어 강원도의 명칭도 원춘도(原春道)로 개호한 일이 있은 이후이므로 그는 ‘강릉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는 약 10년 뒤인 1791년(정조 15) 1월 2일에 “강호(降號)가 이미 10년의 기한을 채웠으므로” 다시 현감에서 대도호부사로 복호되었다. 수신자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상대의 생활은 어떠한지 묻고는 그립다고 했다. 자신은 근래에 독감에 걸려 자리에 누워 앓고 있고, 다스리는 고을의 형편이 매우 박하여 세궤(歲饋)를 보내드리는 것도 뜻만 같지 않다고 하는 등의 근황을 전했다. 끝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세궤의 물목인 백미(白米) 2말[斗], 소고기[黃肉] 2근(斤), 대구어(大口魚) 1마리[尾], 꿀[黃淸] 1되[升]를 후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고을 수령이 중앙의 관리를 지낸 해당 고을의 유력한 양반 집안에 세궤를 보내는 등의 모습이나 당시 주고받던 물목‧단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 『正祖實錄』 『承政院日記』 『丁酉式年司馬榜目』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고) 349.16 사마정유]) 『江陵府使先生案』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殘臘只餘數日 卽不審起居如何 區區不任仰溸 服人 近患毒感 貼席叫苦 自憐自憐 邑況至薄 所謂歲饋 亦不得如意 歉歎歉歎 只希餞迓增祉 病倩姑不宣 伏惟下照 丁未 臘月 卄六 服人 至大 頓 [•白米二斗 •黃肉二斤 •大口魚一尾 •黃淸一升]
權正郎宅 入納 東閣 候書 [着圖書] 省式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