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 분류정보
1757년 송순명 간찰(宋淳明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21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57년 송순명 간찰 / 宋淳明 簡札
- ㆍ발급자
-
송순명(宋淳明)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2 × 4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57년경에 송순명이 권계학에게 붓을 보내면서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757년경의 즉일에 송 정랑(宋正郞)이 안부를 주고받고 근황 등을 알리고자 발급한 간찰이다. 발급일자는 ‘卽’이라고 하여 상대에게 편지를 받은 당일에 곧바로 보냈음을 알 수 있고, 발급자는 상대에 대해 자신을 ‘服人 煩欠悚甚’라고 표현하여 당시 복상(服喪) 중이었으며 정확한 인명은 알 수 없다. 피봉은 별도의 단봉으로, 전면에 ‘宋正郞 候狀’이라는 기록을 통해 발급자의 성은 ‘송(宋)’이고 이 간찰의 발급 당시 ‘정랑(正郎)’ 벼슬에 재직 중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우측에 기록된 “權監察 記室” 을 통해 수신자는 ‘사헌부 감찰’에 재직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간찰의 소장처인 안동권씨 청풍당 문중 일원 가운데 ‘감찰’ 직을 역임한 이력이 있는 인물로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과 그의 차자인 읍죽와(挹竹窩) 권한위(權漢緯, 1743~?)가 있다. 권계학은 1747년(영조 23) 정묘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757년(영조 33) 2월 9일에 감찰에 제수되어 이듬해 2월 13일 예조정랑에 제수되기 전까지 별다른 이동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권한위의 경우 1768년(영조 44) 무자 식년시 병과 19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1786년(정조 10) 4월 19일에 감찰에 제수되어 같은 해 윤7월 15일에 예조정랑 박재순(朴載淳)과 관직 상환(相換) 때까지 별다른 이동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본문에서 언급된 ‘과거에 관한 일’의 경우 수신자가 권계학 또는 권한위라 하더라도 음직이 아닌 이미 출신자(出身者)로서 감찰에 재직했음을 알 수 있고, 뒤에 언급된 ‘노유’라는 말을 통해 수신자와 연관된 가족 가운데 다소 연배가 있던 인물의 일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두 인물의 감찰 재직 당시 송씨 성을 가진 정랑을 찾아보면 권한위의 경우 드러나지 않고 권계학의 경우 같은 해에 호조정랑(戶曹正郎)에 제수된 ‘송순명(宋淳明, 1708~?)’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따라서 수신자는 권계학, 발급자는 송순명, 발급연도는 1757년경으로 추정되나 이 간찰에 담긴 내용만으로 특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본문에서 언급된 ‘분아’는 당시 관리들에게 연례에 따라 물품이나 돈을 나누어 주던 것을 의미하는데, 발급자는 당시 분아물로서 붓 등을 받아 이를 다시 타인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던 실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관성’은 ‘관성자(管城子)’인데 붓을 가리키는 말로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그 전거가 있다. 발급자로 추정되는 송순명은 자는 화숙(和叔), 본관은 여산(礪山), 부친은 송징휴(宋徵休), 생부는 송징계(宋徵啓)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1744년(영조 20) 갑자 식년시 진사 2등으로 입격, 1772년(영조 48) 임진 기로정시 병과 1위로 문과에 급제한 이력이 있다. 승지‧대사간‧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수신자로 추정되는 권계학은 자는 성집(聖集)‧성박(聖博), 호는 죽암,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 등을 역임했다. 연원찰방을 끝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74년(영조 50)에 오죽헌 근방에 청풍당(淸風堂)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상대와 격조한 뒤끝에 편지를 받고 이를 통해 서리가 내리는 추위에 벼슬살이 하는 안부가 좋다는 점을 알게 되어 위로되고 감사하다고 했다. 자신은 잡된 업무에 골몰하고 있다는 등의 근황을 전했다. 과거에 낙방한 일은 노유(老儒)에게 으레 있는 일이니 위로하기에도 족하지 않다고 하였고, 상대가 부탁한 붓[管城]은 분아(分兒)를 통해 받은 것이 있었는데 과거 응시자들에게 수응하는데 거의 다 소진하여 넉넉히 드릴 수 없어 다만 두 자루만 보낸다고 하였다.
- · 『承政院日記』 임호민, 「조선조 명문가의 재도약 과정과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찰 -강릉거주 안동권씨 청풍당淸風堂 가문을 중심으로-」, 『강원사학』39(강원사학회), 2022
참고자료
원문
阻餘承拜惠帖 謹審霜冷 仕履珍相 仰慰且荷 汨汨所冗 相阻至此 可勝悵歎悵歎 科事之無味 老儒例也 何足爲慰 俯示管城 雖有分兒 而臨科酬應殆盡 不得優副 只以二枚送呈 歉歎歉歎 姑不宣狀式 卽 服人 煩欠悚甚
權監察 記室 回納入納 宋正郞 候狀 ■(式) [手決]謹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