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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년~1774년 이형규 간찰(李亨逵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19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73년~1774년 이형규 간찰 / 李亨逵 簡札
- ㆍ발급자
-
이형규(李亨逵, 1733~1789)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3.3 × 51.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73~1774년 편지를 받은 당일에 이형규(李亨逵, 1733~1789)가 권계학(權啓學, 1716~1788)에게 보낸 간찰
- ㆍ기타사항
- 권찰방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773~1774년 편지를 받은 당일에 이형규(李亨逵, 1733~1789)가 권계학(權啓學, 1716~1788)에게 보낸 간찰이다. 발급자 이형규는 자가 중우(仲羽),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명익(李明翼)이다. 1755년(영조 31) 을해 정시 병과 1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지평‧수찬‧교리‧집의‧의주부윤‧강릉부사‧강원도관찰사‧경기도관찰사‧대사헌‧대사간‧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54년 2월 25일 정사에서 경양도 찰방(景陽道察訪)에 제수된 뒤 1756년(영조 32) 6월 25일 이비도정에서 전적(典籍)에 제수되면서 체개(遞改)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급시기를 1756년으로 볼 수 있겠으나, 권계학과는 17살의 나이차이가 있고 55년에 막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을 것이므로, 이 때로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이형규가 보낸 또 다른 간찰 A006_01_A00328_001에서는 권정랑이라 하고 있는데, 권계학이 정랑직을 제수받은 것은 1765년 5월 14일이다. 따라서 이 간찰의 발근년을 전적으로 재직하던 시기로 좌정하기는 어렵다. 편지가 작성된 곳을 선리헌이라고 하고 있는데, 선리(仙吏)는 승정원의 서리를 이르는 말이므로 승정원에 근무할 때 였을 수도 있으나, 그다지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형규가 발급자인 간찰은 모두 권계학쪽에서 감사의 말을 전한 것에 대한 답신이므로, 이형규가 강릉부사로 재직하던 1773년~1774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상령(霜令)은 음력 9월을 이르는 말이다. 권계학이 홍시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답례로 닭 두 마리를 보내면서 과시의 결과 등 안부를 전하는 글이다.
오랫동안 막혀 몹시 그리웠는데 곧 서신을 받고는 9월에 상대의 체후가 좋고 복되다 하니 우러러 그리움이 절실하다고 했다. 상중인 자신은 병을 끼고 과시에 갔다가 겨우겨우 관아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 현산에 가야 하니 근심과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대의 큰 형님이 높은 점수로 선발된 것은 참으로 축하할 만한 일인데, 이 사람이 무슨 힘이 되었겠는가라고 했다. 또 보내주신 각종의 홍시는 말씀하신 수량대로 받았고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두 마리 닭을 보내니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도 좋아해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급히 간찰을 쓰느라 서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으로 맺음말을 삼았다.
원문
權典籍侍史 回納
仙吏軒 謝狀 謹封
阻思耿耿 卽承惠狀 就審霜令 侍履佳福 區區仰慰 服人 扶病赴試 僅僅還衙 而明日 又將作峴山迎命之行 愁憐不可言 令伯氏高參 奉賀奉賀 顧此何力焉 惠來各種紅柿 依受多荷 而恐有二鷄不嫌否 好呵好呵 擾草 不宣謝式
卽日 記末 亨逵 頓
黃肉二斤 大口一尾 伴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