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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01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67년 미상인 간찰 / 簡札
- ㆍ발급자
-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9 × 39.4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67년 9월 5일 자신을 도역행객(桃驛行客)이라고 하는 미상인이 편지를 받고 곧 권계학(權啓學, 1716~1778)에게 보낸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767년 9월 5일 자신을 도역행객(桃驛行客)이라고 하는 미상인이 편지를 받고 곧 권계학(權啓學, 1716~1778)에게 보낸 간찰이다. 권계학의 호는 죽암(竹巖)인데 죽암유고(竹庵遺稿)는 그의 시문집으로 2023년에 율곡연구원에서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본관은 안동(安東), 부친은 권득형(權得衡)이다. 권계학은 1747년 식년시 병과 13위로 문과에 급제한 뒤, 경양찰방‧전적‧감찰‧예조정랑‧겸춘추‧공조정랑‧병조정랑‧연원찰방을 역임했다. 1788년(정조 12) 1월 18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765~1767년에 현재의 충주시 연수동 지역에 있었던 연원역의 찰방(察訪)으로 있었다. 이런 이유로 발신자가 피봉에 연원우헌(連原郵軒) 즉, 연원우역(連原郵驛)이라고 수신지를 적었다. 상령(霜令)은 9월의 이칭이고 간관(間關)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의미이고, 복상(服狀)은 복인 즉, 상중에 있는 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상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전(卽傳)은 전납(傳納)과 같다. 신유백(新留伯)에 관해서는 상고하지 못했다. 편지를 전해서 보낸다는 뜻이다. 찰방직에 있던 권계학에게 길을 다니는 어려움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한 글이다.
앞뒤로 두 번 보낸 서신을 받아 보았는지 묻고 9월에 체후가 어떠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중에 상복으로 인해 고생이 더해져서 근심이 깊다고 했다. 역리들에게 물어보니 분부한 일이 없어서, 이른 바 꿩이나 닭 한 마리도 보낸 일이 없다고 한다는 말을 적었다. 이어서 수년간 서로 물품을 보내준 일이 있는데도 어찌 이리도 고려가 없는가 하면서 참으로 우습다고 했다. 모레 영 밖으로 나갔다가 보름에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이어 이곳의 재랑에게 병든 조카를 데리고 길을 가므로 길을 다니는 비용을 대기가 매우 어려움을 단단히 일러두는 것을 유념해 달라고 부탁했다. 끝으로 너무나 고달프고 정신이 혼미하여 글을 쓰기 어려워서 서식을 다 갖추지 못한다고 했다. 추신으로 모레 일찍 떠날 것인데 만약 내일 저녁까지 도착할 수 있으면 노잣돈을 부쳐달라고 했다. 태에서 보낸 편지는 바로 일가 사람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원문
省式 延原郵軒 卽傳
桃驛行客 候狀 謹封
前後兩度書 經照否 卽問霜令 起居更如何 服人 間關作行 服狀添苦 悶甚悶甚 問驛吏輩 則謂無分付之事 而所謂雉鷄 無一首來納者 積年相納之事 豈有如是無慮耶 好笑好笑 再明轉向嶺外 望日當還 此處齋郞申飭 而率病姪作行之隷 路資極艱 並須留念 如何如何 萬萬憊昏 艱草 不備狀式
丁九初五夜 服人煩欠 拜
再明當早發矣 此隷 如可及於明夕 則路資付送 似好耳 胎去書 卽日傳致一家人處 如何 新留伯 其已發行耶 示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