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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300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773년 권진응 간찰 / 權震應 簡札
- ㆍ발급자
-
권진응(權震應, 1711~1775)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계학(權啓學, 1716~1778)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773년 15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癸巳潤月十五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8.8 × 32.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773년 권진응(權震應 1711~1775)이 권계학(權啓學, 1716~1778)에게 쓴 강릉에 갔을 때 경포에 배를 띄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의 간찰
- ㆍ기타사항
- 연원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773년 권진응(權震應 1711~1775)이 권계학(權啓學, 1716~1778)에게 쓴 간찰이다. 피봉의 황강은 충청도 청풍군(淸風郡) 한수면(寒水面) 황강리로, 우암 송시열의 고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서실 한수재(寒水齋)를 짓고 평생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발급자인 권진응은 권상하의 증손이다. 권진응의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 권상하(權尙夏, 1641~1751)의 증손이며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문인이다. 권진응은 1771년(영조 47)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으로 배척한 『유곤록(裕昆錄)』을 만들자, 상소를 올려 이를 논하면서 증조부 권상하를 변호했고, 이로 인해 그해 3월 14일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인 1772년에 연로하다는 이유로 특별 사면을 받아 해배 되었다. 이 간찰은 다음 해인 1773년에 작성되었다. 1773년 8월 12일의 간찰(A006_01_A00121_001)에서는 권진응의 아들인 권중정(權中正이 아버지가 제주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말하는 병으로 직접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권상하에서 권중정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다음과 같다. 권상하(權尙夏, 1641~1721)-권욱(權煜)-권정성(權定性)-권진응(權震應 1711~1775)-권중정(權中正). 삼척부사를 지낸 권제응(權濟應)은 권정성의 형제인 권양성(權養性)의 아들로, 권진응의 사촌이다. 1765~1767년 사이에 권계학은 연원역(連原驛)의 찰방직으로 있었다. 이때는 찰방직을 그만두고 강릉으로 귀향한 뒤였다. 병천(病倩)은 병이 들어 다른 이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막히어 지내니 그리워할 뿐이라 하고 근래에 무탈하신지 물었다. 자신은 바다로 갔던 여정(1771년에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1772년에 돌아온 일을 가리킨다.)에서 돌아오자마자 며느리 상을 당했으니 지난 슬픔에 새로운 슬픔이 늙은 몸에 겹쳤다고 했다. 이어서 겨우 수명을 연장해서 한 해를 보냈는데 사람의 일을 돌릴 수 없으니 자신이 불쌍할 뿐이라 하고, 이웃한 벗 이가가 산행을 갔는데 행색이 초라하여 낭패를 겪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경포에 배를 띄우는 일은 상대의 힘이 아니라면 결국 경호 근처를 배회하다 돌아와야 할 뿐이겠으니 배를 주선해주어 흥취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해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더불어 권계학의 아들과 형제들의 안부를 묻고 매번 그리워한다고 했다. 자신은 병들어 편지를 대신 쓰게 하는 상황이므로 다 적지 못함을 헤아려달라는 말로 글을 맺었다.
원문
連原郵軒 入納
黃江候狀 謹封
隔嶺相阻 瞻仰徒勞 卽日靜養 不審如何 震應 海行纔歸 旋哭子婦喪 宿憊新哀 交劇衰腸 奄奄經歲 無復人事 自憐奈何 隣居李友 爲遊山行 行色草草 有狼狽之慮 鏡湖泛舟 若不得主人之力 則必不免徘徊湖岸而歸 幸料理舟楫 俾不至敗興如何 令允昆從 俱各安善否 每令人懸情也 病倩 不宣 伏惟諒照 謹候狀上
癸巳潤月十五日 宗末服人 震應 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