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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서대순 간찰(徐戴淳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297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57년 서대순 간찰 / 徐戴淳 簡札
- ㆍ발급자
-
서대순(徐戴淳, 1805~187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권교정(權敎正, 1807~1865)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57년 5월 16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丁巳五月十六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7 × 50.8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57년 서대순(徐戴淳, 1805~1871)이 상대 집안에 있던 두 번의 상을 위로하고 상대가 청한 일에 대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하기 위해 권교정(權敎正, 1807~1865)에게 보낸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57년 서대순(徐戴淳, 1805~1871)이 권교정(權敎正, 1807~1865)에게 보낸 간찰이다. 발급자인 서대순의 자는 원후(元厚)이고 호는 향파(鄕坡)이며 본관은 대구(大邱)이다. 1827년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성, 이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피봉에는 권석사라고 되어 있는데, 동 발급자의 다른 서신에서는 죽헌이라 하고 있는데, 수신자는 시기상 권교정(權敎正, 1807~1865)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오죽헌과 청풍당을 하나의 집안으로 보는 성향이 있었다. 권교정은 청풍당을 설립한 권계학의 현손이 된다. 권계학에서 권교정으로 이어지는 죽헌파 세계는 다음과 같다. 권계학(權啓學)-권한인(權漢仁)-권헌(權櫶)-권기영(權基榮)-권교정(權敎正). 청풍당 자료 중에는 1855년 권교정의 호구단자(A006_01_A00633_001)가 남아 있어서, 권교정의 살림살이를 잘 볼 수 있다. 청풍당 간찰 중 후율(后栗), 후율(後栗)이라고 칭해지는 이는 모두 권교정이다. 원습(原濕)은 멀리 떨어진 근무지를 가리키는 말이고, 재임(齋任)은 성균관이나 향교 같은 데에서 숙식하며 일을 맡아보던 유생 즉, 거재유생(居齋儒生)의 임원이다. 유열(榴熱)은 5월의 이칭이다. 상대 집안에 있던 두 번의 상을 위로하고 상대가 청한 일에 대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간단히 적기 위해 예를 생략한다는 말로 글을 시작했다. 벽지인 근무지에 와서 해주신 말씀을 늘 마음에 담고 있던 중에 서신을 받고 오월에 체후가 편안함을 알았으니 위로가 된다고 했다. 자신은 타향에 있으면서 숙모와 둘째 형님의 부고를 듣고 보니 마음이 찢어질 듯하여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이에 겹쳐서 형님의 삼우제와 졸곡을 겨우 마친 상황에서 둘째 형수의 상을 입었으니 놀라움과 당황함으로 점점 편치 않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본론으로 해주신 말씀을 받들겠으나 재임을 빈번히 교체하는 것도 걱정할 일이므로 숫자를 삼가지 않고 돌려보내니 양해해주시면 어떻겠는가라고 했다. 끝으로 서식을 갖추지 못한다고 했고 추신으로 연(蓮)을 두 개 보낸다고 했는데, 연은 벼루나 붓꽂이를 이르는 말일 것으로 추정되나 확언하기는 어렵다.
원문
權碩士宅 回納
判尹 謝狀上 省式謹封
省禮 原濕歸來 耿誦方摯 卽承審榴熱 閒候萬衛 仰慰仰慰 記下 身在殊域 荐承叔母仲兄二音 慟割情私 已無可言 而家兄虞卒纔過 又遭仲嫂喪 驚廓去益靡寧耳 示意擎悉 而齋任頻遞 亦悶 故爲不愼數字而還送 諒如何 不備式
丁巳五月十六日 朞服人 徐戴淳 狀上
二蓮付呈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