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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80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2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1802~188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청풍당(淸風堂)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2년 7월 19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壬戌七月十九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2 × 49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2년 7월 19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오죽헌 청풍당에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862년 7월 19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오죽헌 청풍당에 쓴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송계근(宋啓根)의 아들이며 송계락(宋啓樂)에게 출계(出系)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리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7대손이다. 송준길은 노론과 소론의 붕당이전에 사망했으나 그의 후인들이 노론을 형성했고, 이로 인해 노론의 색채가 짙은 강릉지역의 유력 문중들과 대대로 교류가 있어 왔다. 송정희는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했고, 직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이 간찰을 쓸 때에는 아직 홍재우(洪在愚, 1806~?)가 강릉에 부임하기 전으로, 양양부사인 송정희가 양양부사의 일을 겸하고 있었다. 호해정(湖海亭)은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에 있는 정자다. 1861년 11월 4일의 간찰(A006_01_A00154_001)에는 호해정 포전(浦田)의 입안(立案)과 관련된 일은 서울에서 답신이 온 후에 도모하면 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입안은 일종의 청원서인 소지(所志)에 대해 별도로 작성한 처분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다. 완문(完文)은 어떤 사실의 확인 또는 권리를 인정하기 위한 특권서 혹은 인정서다. 향례(享禮)는 일종의 제례인데 호해정에서 서원이나 향교에서 지낼만한 향례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해정의 포전과 관련된 분쟁이 있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죽헌에서 양양부사였던 송정희에게 청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첩(下帖)은 관아에서 내린 문서로 당시에 강릉부사가 부재중이었다는 것과 영문(營門)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원주 감영에서 내려온 문서로 보인다.
상투적 인사말을 한 후, 강릉도호부의 일을 겸임하고 있는데 오래지 않아 놓아 보내야 할 것임을 알고 있지만 고뇌가 심하다고 했다. 호해정의 완문을 삼가 살펴보니 호해정의 향예는 없애서는 안될 것이라 참으로 다행이라고 했다. 이어 무릉폭포를 유람하는 것은 좀 선선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나, 그럴 틈이 있을지 보장하기 어렵다고 했다. 영문에서 내려온 하첩은 이미 찾아 왔다면 반드시 뒤에 베껴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상투적인 맺음말을 적었다.
원문
烏竹軒 執事 權察訪宅
襄陽吏 候狀 謹封
日前惠復 尙切慰荷 庚炎轉酷 不審間者 靜候萬衛 仰溯旋切區區 世下 病擾難堪之中 忽當貴府兼任 固知非久解符以送 而苦惱則極矣 湖海亭完文謹覽 而從此享禮 庶不廢闕 誠非細幸 武陵瀑遊賞 擬待凉生 而難保其乘隙矣 營門下帖 如已覓來 必爲謄送於後便如何 適有邑便 暫此姑不備
狀儀
壬戌七月十九日 世下 宋正熈 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