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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송정희 간찰(宋正熙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75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3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1802~188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청풍당(淸風堂)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3년 7월 13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癸亥七月十三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3.8 × 47.5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3년 7월 13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오죽헌 청풍당에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63년 7월 13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오죽헌 청풍당에 쓴 간찰이다. 권찰방은 이 간찰 수신인의 조상인 권계학이 연원찰방을 지냈던 것에서 연유한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송계근(宋啓根)의 아들이며 송계락(宋啓樂)에게 출계(出系)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리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7대손이다. 송준길은 노론과 소론의 붕당이전에 사망했으나 그의 후인들이 노론을 형성했고, 이로 인해 노론의 색채가 짙은 강릉지역의 유력 문중들과 대대로 교류가 있어 왔다. 송정희는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했고, 직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부사에서 목사로 옮긴 것은 좌천성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의 지방관은 산물이 얼마나 풍족한 지역으로 가는가에 따라 승진과 좌천의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주목사로 가는 것은 크게 승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이 간찰에서도 승진(陞移)했다고 자평하고 있는 것이다.
나주목사로 임명된 후, 이별을 고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바빠서 오랫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했으니 어찌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가라 하고, 근래의 안부를 물은 후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인사말을 적었다. 자신은 고달프고 아직 충분히 소생하지 못했으며 지난 여름에 고통이 더해서 몹시 근심이 많았다고 하고, 뜻하지 않게도 나주 목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자신의 분수에 크게 넘치는 것이라 비록 영광된 느낌은 있으나 두려움과 걱정이 많다고 했다. 땅이 크고 폐해가 고착되어 있으면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라, 몹시 근심스럽다고 했다. 이어 이곳 양주에 온 지 삼 년이 되었는데, 귀댁이 멀리 않고 집안 사이의 교류가 깊어서 늙어서라도 관계를 긴밀하게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제 동남쪽 천여 리나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이니 다만 직접 대면할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서신조차 막힐 것이라, 필경 이로써 멀리 나뉠 것을 알겠고 헤어지는 사이에 슬픈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노쇠한 이로서 일마다 쉬이 감회가 생겨서 그런 것이리라 하고, 마침 여러 일로 복잡하여 잠시라도 가서 뵐 수 없으니 슬프다고 했다. 추신으로 18~9일 사이에 출발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보니 뜻대로 길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아서 몹시 우울하다고 했다.
원문
烏竹軒執事 權察訪宅 謹封
間緣奔忙於道路 自致久阻 豈勝悵缺 恪詢比間 靜候萬衛 不任溯昻 世下 行憊未蘇 宿暑添苦 已極悶憐 意外 陞移羅牧 太踰涯分 雖切榮感 實多兢惕 而地大弊痼 將無以矯捄 悚悶萬萬 來寓此邑 三年于玆矣 仙庄旣不遠 而世誼旣摯 晩契甚密 雖未過從源源 秖自心期耿耿 而今將遠離東南
千餘里之地 非但面晤之無階 將與書尺而阻閴 固知畢竟有此闊別 而遽當分張之際 悵黯之悔 實難堪遣 衰老者 觸事易感而然矣 適以公私熏惱之端 非止一二 無由乘隙暫進 尤庸悵嘆 餘惟冀隨時崇護 姑不備禮
癸亥七月十三日 世下 宋正熈 拜
發行似在十八九間 而以今所見 似難如意登塗 極鬱極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