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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송정희 간찰(宋正熙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61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1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1802~188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호해정(湖海亭)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1년 9월 28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辛酉九月念八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31 × 56.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1년 9월 28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호해정에 보낸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61년 9월 28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호해정에 보낸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송계근(宋啓根)의 아들이며 송계락(宋啓樂)에게 출계(出系)되었다.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리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7대손이다. 송준길은 노론과 소론의 붕당이전에 사망했으나 그의 후인들이 노론을 형성했고, 이로 인해 노론의 색채가 짙은 강릉지역의 유력 문중들과 대대로 교류가 있어 왔다. 송정희는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했고, 직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첨재(僉齋)는 여러 재임(齋任)이라는 뜻이고, 재임은 향교 같은 데에서 숙식하며 거기 일을 맡아보던 유생(儒生). 곧 거재유생(居齋儒生)의 임원(任員)을 이르는 말이다. 호해정은 정자로 유생들이 공부하는 재와는 관련이 없지만,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이곳에 머물며 강론하는 등 호해정이 종종 강론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에서 연유한 말로 생각된다. 송정희가 1862년 6월 22일에 쓴 간찰(A006_01_A00172_001)에도 호해정과 김창흡의 인연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송정희에게 호해정은 단순한 정자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1863년 1월 14일에 쓴 간찰(A006_01_A00147_001)에서, 17~8일 사이에 관리를 보내 화본 세 건을 베껴오도록 하겠다고 했고, 1월 16일의 간찰(A006_01_A00156_001)에서는 화본을 모사하는 것과 관련해서 관리 한 명을 보낸다고 했다.
화본의 모사와 관련해서 호해정에 신세를 진 일이 있는 듯하고, 이와 관련된 감사가 주요한 내용이다. 한달 전에 귀 댁에 들러서 훌륭한 분을 만나 뵙고 가까운 과거의 친의를 말할 수 있었으니 위로됨이 참으로 깊었으나 돌아오는 일이 급하고 바빠서 조용히 뵙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탄스럽다는 것으로 인사말을 삼았다. 시절에 맞지 않게 겨울 비가 내리고 있는데 무탈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 후 매우 그립다고 했다. 자신은 유행성 질병으로 앓다가 겨우 살아난 후 곧 답답함을 풀어내려 금강산에 갔다가 돌아온 지 겨우 열흘이 되었다고 했다. 올초에 관리 한 명을 보내 송담서원의 구적(舊蹟)을 모사해와서 훗날 존모의 미미한 정성으로 삼으려 했는데, 뜻한 바를 이뤘다고 했다. 일하는 이들이 머무르는 중에 댁에 크게 폐를 끼쳤으니 이것이 참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끝으로 틈을 타서 다시 만날 것임에 우선 서식을 갖추지 못하고 마친다고 했다.
원문
湖海亭 僉齋座執事
襄陽吏 謝書 謹封
月前 委進仙庄 旣遂識荊之願 兼講宿昔之誼 慰幸實深 而歸急 甚忙 不得穩晤 尙今悵嘆 冬雨乖宜 伏惟此時 靜候萬壽 仰慰且溯不任 世下 向患輪痁 僅得回甦 卽作楓嶽之行 盖爲疏暢之計 而歸纔旬日 曠務助惱 私悶曷極 今初 起送一吏 模寫松潭院中舊蹟 以來用寓尊慕之微誠 將作傳世之希珍榮幸之極 如何形狀 固知此擧之 萬萬難愼而勤念攸曁 俾遂宿願 尤銘感深感深矣 第下輩留住之際 自多貽獘於貴中云 是庸歉嘆 餘留 早晩間 乘隙更晉 姑不備 謹拜候上
辛酉九月念八日 世下 宋正凞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