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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송정희 간찰(宋正熙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55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1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오죽헌(烏竹軒)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1년 10월 24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辛酉十月卄四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6.7 × 44.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1년 10월 24일에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오죽헌에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61년 10월 24일에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오죽헌에 쓴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송계근(宋啓根)의 아들이며 송계락(宋啓樂)에게 출계(出系)되었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했고, 직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송정희는 안동권씨 오죽헌과 누대에 걸친 교류가 있던 집안의 사람으로, 강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론계통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7대손이다. 송준길 집안의 글을 묶은 덕은가승(德恩家乘)을 편집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리며 노론을 대표한다. 노론과 소론의 붕당이전에 사망했으나 그의 후인들이 노론을 형성했다. 청풍당 간찰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로 노론계통의 집안과 강릉지역 사이에 있었던 교류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나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후손들과 권계학 사이에 있었던 교류 관계로 권계학이 현재의 충주지역에 있었던 연원역(連原驛)의 찰방을 지낸 일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는 이 간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송준길의 후손인 송정희가 양양부사로 있었던 연유로 청풍당 및 오죽헌 사이에 있었던 교류관계를 들 수 있다. 1861년 11월 4일에 작성된 간찰(A006_01_A00154_001) 보다 약 열흘 전에 쓰여진 것으로 두 간찰을 비교하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 수 있다. 1861년 10월 29일에 작성된 간찰(A006_01_A00145_001)에서 말하고 있는 송원의 병풍과 족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순서상 이 간찰(10월 24일), A006_01_A00145_001(10월 29일), A006_01_A00154_001(11월 4일)의 순으로 읽으면 이야기의 대강을 알 수 있다.
수일 전의 간찰을 지금에야 읽고 있었는데 마치 같은 곳에 앉아 있는 듯했고, 상대의 5촌 조카가 와서 서로 인사하는 중에 다시 간찰을 받아보았다고 말한 후, 요즘에 편안타고 하니 어찌 큰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했다. 이어 자신은 여전한데 앞으로 열을 내에 고향에 가야겠기에, 그 전에 꼭 강릉에 들러 송담서원의 보물 중 먼저 봉납할 것을 그리할 것이며, 따라서 내일 오전에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병풍과 족자는 누차 받들어 보았는데 이번에 가지고 가는 것은 우선 상대의 집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양양으로 돌아온 후 노예를 보내 송담서원에 봉납하도록 할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관리들이 삼가 보존하지 못하고 도리어 더럽힐까 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진본이 더럽혀진 것이 참으로 한탄스럽다고 하고 서식을 갖추지 못한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원문
烏竹軒執事
襄陽吏 謹謝書 謹封
日前惠復 至今披慰 適坐洞倉 因令從侄之來訪 欣握之餘 獲拜華翰 恭審比間 靜候萬衛 豈勝仰慰 世下 一如前狀 而鄕行當在來旬間 故其前必欲往謁卯山院宇 將自此先晋貴中 仍爲前進計 明日早晩間 可以拜晤矣 屛簇累回奉玩 今行持來 以爲姑留置於貴宅 而再三明間還官後 卽當專送一隷 俾卽持納於松潭院中之地 盖慮空官時 知印輩未必謹護 反有傷汚之端故耳 第眞本之漫漶 極爲歎惜矣 餘留姑不備 拜謝上
辛酉十月卄四日 世下 宋正熈 拜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