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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49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3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3년 7월 16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癸亥七月十六日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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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크기: 23.6 × 46.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3년 7월 16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권계학(權啓學, 1716~1778)의 후손 중 한 명에게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863년 7월 16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권계학(權啓學, 1716~1778)의 후손 중 한 명에게 쓴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송계근(宋啓根)의 아들이며 송계락(宋啓樂)에게 출계(出系)되었다. 1834년(순조 34) 의 식년시 진사 3등 42위로 입격한 뒤 음직으로 최말단 관직인 참봉직을 제수받았다. 홍산현감‧공조좌랑‧보은군수‧양양부사‧나주목사‧사복시정‧공조참판을 역임했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했고, 직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나주지역의 산물을 고려할 때, 양양부사에서 나주목사로 이임한 것은 영전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권찰방은 권계학(權啓學, 1716~1778)이 1765~1767년에 현재의 충주시 연수동 지역에 있었던 연원역(連原郵驛)의 찰방(察訪)직에 있었던 것에서 연유하는 표현이다. 회납(回納)은 답신이라는 뜻이다. 이 간찰은 청풍당에서 송정희에게 보낸 간찰의 답신이다. 세하(世下)라는 것은 가문 사이에 대대로 교류가 있었던 집안 사이에서 자신을 이르는 표현이다. 주로 호서지역에서 활동했던 송정희의 가문과 오죽헌 사이에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권계학이 연원찰방으로 있었을 때 교류가 있던 같은 안동권씨 집안의 권진응은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권상하의 증손이고, 송정희는 송시열과 본관이 같다. 이런 배경으로 두 집안 사이에는 일정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복후(服候)는 상중에 있는 이의 안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면례(緬禮)는 이장을 말하는데, 이 간찰을 쓰기 직전에 권계학의 집안에서 면례를 치뤘던 것으로 보인다.
1863년 나주로 떠나기 전에 이별을 알리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먼저 일전에 편지를 쓰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번에 받게 되니 마치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위로가 된다고 했다. 이어 근래에 체후가 무탈하다 하시니 매우 흡족하여 듣고 싶었던 말이라고 했다. 면례를 치뤘다고 했는데 마치 처음으로 장례를 치뤘을 때처럼 애통하고 그리운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인사말을 마쳤다. 자신은 19일에 길을 떠날 예정인데 머리가 어지럽고 번거로운 일이 많아서 예상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잠깐의 틈을 낼 수 있으면 잠깐이라도 들르고 싶지만 공사의 일로 얽혀있어서 그러지 못한다고 하고 이별을 고했다. 끝으로 상대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축원을 하고 예를 다 갖추지 못한다고 하면서 글을 맺었다.
원문
烏竹軒執事 回納 權察訪宅
省式謹封
省式 日前修候 方俟復教 意外獲奉惠翰 慰若合席 仍審比來 服候無損 尤愜願聞 緬禮間已過行云 想當痛慕如新矣 世下 擬以十九日登程 而熏擾多端 未必其如期發行矣 如可乘隙 則豈不暫進 而果緣公私事故之掣碍 竟未遂意 仍作濶別 其所悵黯 如何形狀 惟祝隨時萬護 餘姑不備謝禮
癸亥七月十六日 世下 宋正熈 拜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