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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송정희 간찰(宋正熙 簡札)
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46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3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1802~188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
1863년 2월 21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癸亥二月卄一日
- ㆍ형태정보
-
점수:크기: 22.4 × 45.3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3년 2월 21일에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權啓學, 1716~1778)의 후손에게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 ㆍ수장고
- 이름: 서가위치: 단위치:
해제
1863년 2월 21일에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權啓學, 1716~1778)의 후손에게 쓴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부친은 송계락(宋啓樂)이고 생부는 송계근(宋啓根)이다. 1834년(순조 34) 의 식년시 진사 3등 42위로 입격한 뒤 음직으로 최말단 관직인 참봉직을 제수받았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로 재직했고,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이임했다. 양양부사에서 나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부에서 목으로 옮긴 것이 이상해보일 수 있으나, 양양과 나주에서 나는 물자를 비교해 볼 때, 상당한 특혜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신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하(世下)는 집안 간의 교분이 대대로 이어져 온 경우에 발급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이므로 송정희의 가문과 안동권씨 권계학 가문 사이에 교분이 있었고, 이 글도 권계학의 후손에게 보낸 것임은 분명하다. 율곡연구원에는 송정희가 권계학의 후손에게 보낸 편지가 약 30점 정도 있다. 대체로 간찰은 초서를 쓰는데 송정희의 간찰은 반초를 조금 섞어 쓸 뿐이다. 후상(候狀)은 안부편지를 이르는 말로 후간(候柬), 후서(候書), 후첩(候帖)과 같다. 잠초(暫草)는 짧게 적는다는 뜻으로 간찰을 쓸 시간적 여유가 넉넉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맺음말이다. 등조(登照)는 입조(入照)와 같다. 상대가 보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A006_01_A00143에서는 호해정의 일을 알고 있었는데 이 번에 자세히 들어서 안심이라고 하면서, 강릉부사가 부재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이것은 본 간찰의 뒷부분에 자신이 양반인 최씨의 소장에 대해 처분을 하기는 했으나, 일의 처리는 본관에 달려 있다고 한 말과 관련 있을 것이다. 특정 지역의 지방관이 자리를 비운 경우 일상의 작은 일은 향리들이 처리했으나, 송사 같은 일은 인근 지역 지방관이 겸사했다. 본관운운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몇 가지 일상을 전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먼저 일전에 간찰을 보냈는데 아마도 보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바람이 여전히 찬 시절에 상대는 건승하신지 가족은 모두 편안하신지 묻고 그리움이 지극하다는 말로 시작한 후, 자신은 병을 앓고 있어 이미 봄에 관할지를 순찰하는 일을 그만뒀고 이에 더해 말미를 청해 집으로 돌아갔다가 4월에 돌아올 예정인데 그 후에 강릉에 들를 계획이라 틈을 타서 그대의 댁에도 들를 생각이라 말하고, 수 개 월간 격조할 것이니 벌써 슬프다고 한 후 이런 내용을 다른 분들에게도 전해달라고 했다. 양반인 최씨는 정말로 소장을 내었는 바 처분을 내렸는데, 향후 일이 순조롭게 처리될지는 오로지 본관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하고, 나머지는 인편에 잠시 쓰는 것이라 예를 다 갖추지 못한다는 인사말로 글을 마무리 했다.
원문
烏竹軒執事 權察訪宅
襄陽吏 候狀 謹封
日前修謝 想卽登照矣 風寒尙峭 此時靜候萬衛 諸宅俱安否 仰溯不任 世下 一依病冗樣 而春巡旣停止 故方請由還家爲計 四月內返衙後 可圖一進貴府 伊時丕擬歷路 暫入仙庄 而其前將致數月之阻 何等悵缺 此由必爲傳及於諸宅 如何 崔班果卽呈訴 故雖論題以送 而向後妥帖與否 惟在於本官處分矣 餘因便暫草 姑不備狀禮
癸亥二月卄一日 世下 宋正熈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