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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ㆍ자료ID
- A006_01_A00144_001
- ㆍ입수처
- 안동권씨 청풍당
- ㆍ자료유형
- 고문서
- ㆍ유형분류
- 서간통고류-간찰(簡札)
- ㆍ주제분류
- ㆍ문서명
- 1862년 송정희 간찰 / 宋正熙 簡札
- ㆍ발급자
-
송정희(宋正熙, 1802~1881)
원문내용:추정:
- ㆍ수취자
-
원문내용:추정:
- ㆍ발급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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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8일간지연도:왕력:추정시기:본문: 壬戌五月初八日
- ㆍ형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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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크기: 29 × 42접은크기: ×서명:인장종수:보존상태:언어:자료형태:
- ㆍ정의
- 1862년 5월 8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권계학의 후손에게 쓴 간찰
- ㆍ기타사항
- ㆍ현소장처
- ㆍ지정문화재
- 이름: 분류: 지정년도:
해제
1862년 5월 8일 송정희(宋正熙, 1802~1881)가 쓴 간찰이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본관은 은진(恩津), 부친은 송계락(宋啓樂), 생부는 송계근(宋啓根)이다. 1834년(순조 34) 의 식년시 진사 3등 42위로 입격한 뒤 음직으로 최말단 관직인 참봉직을 제수받았다. 영릉참봉(寧陵參奉)‧홍산현감(鴻山縣監)‧공조좌랑‧보은군수‧양양부사‧나주목사‧사복시정‧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이 간찰을 쓸 당시에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중이었기 때문에 양양리(襄陽吏)라고 썼다.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양양부사로 재직했고, 직후 나주목사로 이임했다. 권찰방(權察訪)이라는 표현은 수신자의 선조인 권계학이 1765년부터 1767년 하반기까지 충주시 연수동에 있던 연원역(連原驛)의 찰방으로 있었던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신자는 죽암(竹巖) 권계학(權啓學, 1716~1788)의 후손인 사죽당(思竹堂) 권박(權樸, 1773~?)의 아랫대일 가능성이 크다.
간찰을 쓴 다음날인 5월 9일에 (현재의 강릉에 소재한) 청학산을 탐방하려 하는데, 혹 들릴만한 곳이 있으면 알려줄 것과 어렵겠지만 같이 갈 수 있는가하고 청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오랫동안 격조했으니 어찌 슬픔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라는 인사말과 상대의 안부를 묻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자신의 홀로 된 형수가 숙환으로 오랫동안 위독했으므로 임지인 양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어서 4월 20일경 돌아왔는데, 아직 집안 소식이 닿지 않아 우울해서 병이 생길 지경이며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고 공무는 쌓여서 고민이 많다고 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음력 8월이나 되어야 고향에 갔다가 10월 그믐에야 돌아올 계획인 바, 어디를 놀러 다닐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선현들의 자취를 따라 유산코자 하는데 승려들이 위험한 곳을 꺼려 인도하려 하지 않으며 빼어난 곳을 피하여 왔으므로, 혹 청학산의 명승지를 알고 있으면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추기로 현재 바빠서 두루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대신해서 다른 분들께도 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을 적었다. 조선시대 후반, 특히 18~19세기에는 유산(遊山)의 문화가 특히 유행했는데, 사족이 산행을 할 때는 해당 산의 승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거나 가마를 메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간찰에서 승려들이 명승지를 가려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른다는 뉘앙스는 사실 사족의 유산문화에 노동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
烏竹軒靜座執事 入納 權察訪宅
襄陽吏 候書 謹封
隔歲阻閴 曷勝悵黯 居然夏序已半 恪詢此時 靜候萬衛 諸宅勻安否 幷庸溯昻區區 世下 在家時 邱嫂宿患 屢朔沈篤 日輒憂悶 不得遠離 以致許多曠官 始於去月念間到衙 而家信姑無入聞 紆鬱若將生病 且路憊未祛 公務坌集 事事愁惱而已 此際何暇念及於遊賞 而鄕行又將在於仲秋間 其還 當拖至于初冬晦間 故擬以再明 入靑鶴洞 非專爲耽玩泉石也 先賢杖屨之所 將欲摩挲寓慕 而今聞靑鶴寺僧徒畧有數三名 以憚危險 不欲前導 一以諱却勝地爲習云 故玆煩懇 幸望俯諒 而其程里之遠近及勝地之擅名處 若有前所入聆者 必爲詳錄以示之地 如何如何 執事若或偕作探勝之行 則甚好 而窃恐未易矣 再明若無雨魔 則當早發 路由連谷計耳 餘留續申 姑不備狀禮
壬戌五月初八日 世下 宋正熈 拜
今適忙擾 不得修候於諸宅 極悵極悵 第以此由傳告之 爲望
